참으로 극적인 삶이었다. 19세기 중반 일본에서 태어나 해외를 떠돌다 대만의 어느 거리에서 술에 취해 죽을 뻔했던 청년 소다 가이치(曾田嘉伊智, 1867~1962). 그는 대부분의 생애를 조선에서 보내며 이 땅의 버려진 고아들의 아버지로 살았다. 방황과 혼란 속에서 살던 그를 조선으로 인도한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을 것이다. 은인의 나라를 찾아온 그에게 최고의 선물은 복음이었다.
단순히 기독교 신앙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에까지 영향을 미친 실천적 믿음을 갖고 있었다. 서양인 선교사들이 묻혀 있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 묘원에 유일하게 안장되어있는 일본인. 그가 양화진에 묻힐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선한 사마리아인을 만나
1867년 일본 조슈번(현 야마구치현)에서 출생한 소다 가이치는 21세 때부터 떠돌이 생활을 시작한다. 서양 문물의 유입 경로였던 나가사키를 찾아가 탄광에서 일하며 초등학교 교사로도 활동하던 중 20대 중반 노르웨이 화물선 선원으로 승선해 홍콩에서 잠시 정착해 영어를 익힌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지금의 대만으로 입국해 독일인이 경영하는 공장에서 사무원 겸 통역으로 일한 적도 있다. 심지어 중국 본토에 가서는 해군으로 복무하고, 쑨원의 혁명운동에까지 가담한 독특한 이력을 가졌다.
30대에 다시 대만으로 돌아온 소다 가이치는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이한다. 술에 취한 채 거리에 쓰러져 죽을 뻔한 그를 이름도 알 수 없는 조선사람이 구해준 것. 성경 속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았던 조선사람은 의식이 없던 소다를 여관에 업어다 치료해주고 밥값까지 내어준 것을 알게 된다.
조선사람을 만난 것을 계기로 소다 가이치는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6년 후이던 1905년 은혜를 갚겠다고 결심하고 조선으로 향한다. 그는 황성기독교청년회(현 서울YMCA)에서 일본어 교사로 일하게 된다. 당시 YMCA는 민족 지도자들이 대거 모이는 곳이었고, 그 중 월남 이상재 선생이 있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당시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던 소다는 실천하는 신앙인이었던 월남을 만나 자신도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다.
월남은 한성감옥에 투옥되어 있던 중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을 접한 후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고, YMCA를 중심으로 1927년 별세할 때까지 조선의 기독청년운동을 이끌었다. 소다는 1908년에 숙명여고와 이화여고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역시 독실한 믿음을 갖고 있던 우에노 타키와 결혼했다. 그의 나이 41세 늦은 나이였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YMCA 동료들이 수감의 고초를 겪자, 소다는 같은 고향 출신의 데라우치 총독을 직접 찾아가 석방을 요구할 정도로 행동파였다. 1919년 월남이 3.1운동 여파로 투옥되자 대법원장 와타나베를 찾아가 항의할 정도였다.
예수를 믿고 고아를 품다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소다 가이치는 험난했던 인생 여정 끝에 만난 예수님을 간증하며 복음을 호소력 있게 전하는 평신도 전도자였다. YMCA 지도자였던 오리 전택부 장로는 “소다 전도사는 젊었을 때 술을 많이 마시고 난폭한 짓을 많이 저질렀던 불량배였다고 고백하며 복음을 전하던 신실한 사람이었다”고 증언했다. 조선인의 도움으로 생명을 건진 이야기는 조선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소다는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 집회마다 참석해 성경을 깊이 배웠고 믿음은 더욱 깊어졌다. 신앙인이었던 아내 우에노 타기의 영향도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내는 퇴직할 때까지 미션스쿨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소다의 사역을 지원하고 응원했다. 소다는 일본 경성감리교회 전도사로 시무하기도 했다.
소다에게 찾아온 또 한번의 인생 전환점이 있었다. 그것은 1921년 가마쿠라보육원 경성지부장이 된 것. 일본에서 시작된 가마쿠라보육원의 지부로 현재 영락교회가 운영하고 있는 ‘영락보린원’의 전신이다. 1926년 퇴직한 아내까지 합류하면서 고아들을 돌보는 사역은 더욱 강화됐다. 소다 부부가 1945년 해방 때가지 돌본 고아만도 1,100명이 넘는다.
부부는 어린 고아들을 위해 젖동냥을 다니고, 보육원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 수레를 끌고 안 다닌 곳이 없었다. 보육원 아이들은 소다를 ‘하늘 할아버지’ 우에노를 ‘하늘 할머니’로 부르곤 했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때에는 보육원 출신 고아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 때문에 헌병대에 불려가기도 했다. 고아원에서 항일정신을 가르치고 있다는 혐의를 받았던 것이다. 그는 헌병대에 찾아가 자신의 잘못이라면서 독립운동을 한 고아들의 석방을 돕기도 했다.
보육원 원장이면서 전도사로 시무하던 소다는 1943년 보육원을 아내에게 맡기고 함경남도 원산감리교회에 부임한다. 목사가 없는 교회에 무보수 전도사로 시무하기 시작한, 당시 그의 나이는 77세였다.
양화진선교사묘원에 묻히다
1945년 일제 식민 통치에서 해방될 때 조선 땅에 있던 약 6백 만명의 일본인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야 했지만, 소다 부부는 특별허가를 받아 계속 조선에 머물 수 있었다. 러시아군이 북한 지역에 진주하면서 일본인 집에 들어가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할 때, 소다 전도사의 교회는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 러시아군은 교회까지 찾아왔지만 원산 사람들이 존경하던 어른 소다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해방된 조선에서 계속 살 수 있었지만, 소다는 1947년 마지막으로 철수하는 일본인들과 일본으로 떠난다. 보육원은 아내에게 맡겼다.
소다가 패망한 일본으로 향했던 이유는 고국 사람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역사를 갖고 있었지만, 그는 ‘세계평화’라고 새겨진 띠를 두르고 일본 곳곳을 다니며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당시 일본 언론에서 다룬 그의 귀국 기사 제목은 ‘전도를 위해 귀국’이었다.
그가 일본에서 전도자로 사는 사이 아내는 급성 폐암으로 1950년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한국사회산업연합회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주었다.
일본에서 살던 소다 가이치는 십여년이 지나 그토록 그리던 한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냉각상태에 있던 한일관계인데다 수교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한국에 오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아사히신문에 귀국을 염원하는 소다의 기사를 접한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를 비롯한 많은신앙인들의 노력으로 1961년 94세의 나이에 서울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듬해 1962년 3월 평생을 바쳐 고아들을 돌봤던 영락보린원에서 그는 하나님의 품에 안긴다.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인에게 처음으로 문화훈장을 추서했고, 그의 장례식은 문화 종교 교육 경제 등 19개 단체가 공동으로 주최한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그리고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