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적 부흥운동 점화시킨 한 선교사의 영적 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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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적 부흥운동 점화시킨 한 선교사의 영적 각성
  • 이인창 기자
  • 승인 2024.09.24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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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 ‘선교사 열전’ ㉒ 회개의 불씨 된 ‘로버트 하디’

한국교회뿐 아니라 세계 교회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결코 한순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강력한 성령운동의 기폭제가 있었다. 역사학자들은 바로 1903년 원산에서 있었던 회개운동에 주목한다. 당시 함경남도 원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곳에는 바로 로버트 하디(Robert Alexander Hardie, 1865~1949, 한국명:하리영)라고 하는 외국인 선교사의 회개가 있었다. 14년 동안 사역하면서도 은혜보다 불평과 불만만 쌓여갔던 그는 모든 문제의 근원은 자신임을 고백했고, 회개는 들불처럼 번져갔다. 한국교회 대부흥의 중요한 씨앗을 심었던 이가 바로 하디 선교사이다.

첫 사역지 부산에서 원산까지 
1865년 캐나다 온타리오주에서 출생한 로버트 하디는 불과 10살 되던 해 어머니와 아버지를 잇달아 여의고, 이후 친지들의 손에 자랐다. 대학공부를 마치고는 2년 동안 교사로 활동하던 하디는 세상에 유익을 주는 존재가 되길 바랐던 생전 부모님의 뜻을 떠올리다, 토론토 의과대학에 진학한다. 

19세기 후반 전 세계 선교지마다 청년들이 선교사로 헌신하도록 이끌었던 ‘학생선교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영향을 하디도 받게 된다. 바로 그때 토론토대 YMCA가 조선으로 파송했던 제임스 게일(James Scarth Gale) 선교사의 강연을 듣게 된다. 이제 막 조선의 문이 활짝 열렸는데, 파송할 선교사가 없다는 호소에 아내 켈리와 함께 응답한다. 토론토 의과대학과 YMCA 후원으로 조선에서 사역할 길이 열렸다. 

하디의 첫 사역지는 부산이었다. 1890년 9월 말 일본을 거쳐 부산에 도착한 하디는 게일 선교사를 먼저 만났다. 이듬해부터는 본격적으로 환자를 돌보며 성경과 조선말을 공부했고, 틈이 날 때면 거리에 나가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 잠시 서울 제중원에서 활동하기도 했지만 주로 부산에 머물며 유일의 서양 의사로서 외국인 진료까지 도맡다시피 했다. 

하지만 하디는 금방 지쳤다. 기다리던 부흥은 일어나지 않았고, 다른 선교사들보다 선교비가 적은 사실을 알고는 실망도 컸다. 심지어 아내 켈리의 건강까지 좋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던 하디는 1892년 선교지를 원산으로 갑자기 옮긴다. 2년이 채 되지 않은 시기였다. 같은 캐나다 출신의 펜윅 선교사와 미국 감리회 출신 의료선교사 맥길의 제안에 곧장 응답했다. 하디의 원산 사역은 초기에는 순탄한 듯 보였다. 본국 선교부에서 건축비까지 지원받아 원산 최초의 서양식 건물을 완공해 진료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하디는 다시 침체기에 들어간다. 낯선 외지에서 사람들을 믿기 어려웠고 늘 실망만 있었다. 부족한 선교비로 인해 생활은 언제나처럼 곤궁했다. 

피로와 불만만 쌓여 가고 
심리적인 압박과 상대적 박탈감 속에서도 하디는 몸부림치듯 사역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난 후 콜레라까지 확산되는 과정에서 하디는 서울로 피신하는 대신 원산을 지켰다. 전염병이 잦아들면서 하디는 한동안 갈 수 없었던 순회 전도를 전개하기도 했다. 시골 마을 곳곳을 순례하며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보람도 컸다.

하지만 1896년 하디는 사역을 중단하고 가족과 함께 귀국길에 오르고 만다. 파송 당시 선교회가 후원하기로 약정한 기간은 8년이었지만, 약정이 갱신되지 않았고 선교비마저 끊기고 말았다. 

2년이 흐른 후 1897년 10월 하디는 미국 남감리회 소속으로 당시 원산을 방문하며 사역을 시작했다. 다시 돌아왔을 때 병원은 수리가 필요했고, 교인들 대부분 다른 교회로 떠난 것을 확인하고는 개성에서 다시 사역을 전개한다. 남감리회가 개성에서 병원을 건립해 사역을 계획했을 때 하디가 돕게 된 것.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개성의 사역 책임자 리드 선교사가 아내의 병으로 인해 귀국하게 되자 하디는 서울로 사역지를 옮기게 되었고 개성에서 의료사역은 중단됐다. 

1899년부터 서울에서 사역하던 하디는 1900년 10월 남감리회 중국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게 된다. 목사안수를 받은 후에는 원산으로 돌아와 의료선교사보다 목회자로서 복음 전파자의 삶을 살아간다.

실제로 하디는 오지를 다니며 열심히 복음을 전했고, 믿음을 결단한 사람들도 적지 않게 생겨났다. 하지만 그의 선교 기록을 보면 신앙의 발전이 더딘 모습에 크게 실망한다. 조선 사람들의 영적 상태에 대해 불만이 가득했고, 목회에 대한 한계와 좌절감도 극에 달하는 듯했다.

1903년 하디 선교사의 죄책 고백은 들불처럼 번져 동료 선교사뿐 아니라 원산지역 성도들에게까지 퍼져갔다. 회개운동은 결국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일어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들불처럼 번진 회개운동
이처럼 불만 가득한 하디를 통해서 어떻게 1903년 원산부흥운동이 촉발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역사학자들은 1903년 초부터 사경회 등을 통해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본다. 

여름철을 맞으면서 중국 의화단사건으로 조선으로 피신한 여선교사 메리 화이트와 캐나다 출신 여선교사 루이스 맥컬리가 매일 기도회를 열었다. 다른 지역 선교사들도 원산으로 휴양 차방문해 기도회에 합류했다. 선교사들은 고참 격이던 하디에게 3번의 성경공부 인도를 부탁했고, 강의를 준비하던 중 하디는 말씀 안에서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 깊이 깨닫게 된다. 성령 충만하게 된 하디는 기도회를 인도하면서 후배 선교사들 앞에서 눈물로 자신의 부족함과 죄악을 고백하고 회개를 쏟아냈다. 

“애를 써도 수고의 결과가 없는 원인이 나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점점 더 내 영적 능력이 부족한 것이 이유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의 임재와 능력이 없이는 모두 소용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사역하면서도 불만과 불평이 가득했던 하디, 조선 사람들을 무시하던 하디는 근본적인 원인을 비로소 자신에게서 찾게 된다. 잘못을 깨닫고 죄인임을 고백하면서 오히려 그는 평온해질 수 있었다. 성령의 역사는 이때를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확대되어 갔다. 하디의 고백은 동료 선교사들의 죄책 고백으로 이어졌고, 조선의 성도들도 깊은 영향을 받았다.

하디는 1903년 8월 30일 주일예배 때 다시 한번 원산 교인들 앞에서 고백한다. 9월 이후에는 부흥회가 열릴 때마다 크고 작은 죄를 고백하는 성도들이 엄청나게 많아졌다. 원산에서 촉발된 회개운동은 평양, 개성, 서울, 인천 등 다른 지역에도 퍼져갔다. 하디가 인도하는 부흥회는 한 주를 더 연장할 정도로 가는 곳마다 뜨거웠고, 다음 해에도 성령의 이끄심에 순종하며 회개는 계속됐다. 바로 그 기도의 불씨가 이어진 끝에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었다. 

하디는 조선에서 사역하는 동안 교육사역과 문서사역 등에 헌신하며 한국교회에 지대한 역할을 미쳤다. 그는 1935년 70세 정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갔고, 1949년 미국 미시간주에서 84세를 일기로 하나님 품에 안겼다. 하디는 조선을 떠나던 날,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을 마지막으로 들렀다. 그곳에는 1893년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사망한 셋째 딸 ‘마리’와 1909년 6살 때 사망한 넷째 딸 ‘마가렛이 안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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