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으로 세상을 바꾸고 여성의 미래를 밝힌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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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으로 세상을 바꾸고 여성의 미래를 밝힌 선교사
  • 이인창 기자
  • 승인 2024.08.07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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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 ‘선교사 열전’ ⑱ 충청 소녀들의 어머니 ‘앨리스 해먼드 샤프’

구한말 내한 선교사들이 마주한 조선 여성들의 현실은 말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특히 여선교사들은 인격적인 대우를 전혀 받지 못하는 여성들의 현실에 누구보다 가슴 아파했다. 이름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했고, 이름이 있더라도 변변치 않았다. 조혼 풍습으로 인해 교육은커녕 한글조차 읽지 못했다. 겨우 십수 년 부모와 살다 시집가면 그만이었다. 

충청지역 선교지부에 남편과 함께 파견된 앨리스 해먼드 샤프(Alice  Hammond Sharp, 1871~1972) 선교사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도 여성의 현실이었다. ‘사(史) 부인’이라고 불리기도 했고, 사애리시(史愛理施)라는 이름을 사용했던 앨리스 선교사는 40년 동안 조선에서 살며 복음과 교육으로 여성들의 인생을 바꾸어주었다. 그중 한 사람이 우리가 잘 아는 유관순이다. 

“여성도 같이 예배드려야 한다”
1871년 캐나다에서 출생한 앨리스는 미국 뉴욕에서 선교사 훈련을 받은 후 1900년 미감리회 해외여성선교회 파송을 받아 조선 땅에 도착한다. 감리회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고자 만든 해외여성선교회는 조선의 첫 여성선교사 매리 스크랜턴을 파송한 단체이기도 하다. 실제로 앨리스는 서울에서 매리 스크랜턴을 도와 이화학당 교사로 사역하기도 했다. 

앨리스는 미 북감리회 파송을 받아 1903년 조선에 도착한 로버트 샤프(Robert A. Sharp) 선교사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로버트가 조선에서 적응을 마치자 부부는 충남 공주지역 선교지부 책임자로 임명받는다. 이미 공주에는 의료선교사 맥길(William B. McGill)이 사역의 토대를 닦아 놓고 있었다. 

샤프 부부는 공주에 서양식 벽돌집을 직접 건축하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특히 앨리스는 여성들을 위한 전도와 양육에 매진하게 된다. 남녀가 유별한 조선의 관습을 생각할 때, 여성 사역을 위해 여선교사는 꼭 필요한 존재였다. 

처음부터 앨리스는 여성들에게 가혹한 현실의 벽을 실감했다. 더 실망스러웠던 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믿는다는 남성 교인들의 태도였다. 공주지역 부임 후 초기 순회 전도를 갔을 당시 남자들만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앨리스 부임하기 전 충청지역에만 50여개 교회가 이미 설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여성들의 모습을 보기는 어려웠다. 

방문 교회에서 앨리스는 여성들도 당연히 예배를 같이 드려야 한다고 설득했다. 여성 역시 구원받아야 할 소중한 존재임을 역설했지만 남성 교인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여성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이고, 가르쳐봐야 잘 알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여성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앨리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스스로 주님 안에서 평등한 존재임을 일깨워주었다. 예수를 믿게 된 여성들은 스스로 깨닫기 시작했고, 교회 안에서 여성의 역할과 지위도 커질 수 있었다. 

남편 잃고도 선교사명 이어가
공주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앨리스는 사별이라는 큰 아픔을 겪게 된다. 1906년 3월 남편 로버트 샤프가 강경 논산 지역으로 순회 전도를 하던 중 장티푸스에 걸려 사망한 것이다. 앨리스는 충격에 사역을 중단하고 미국으로 귀국하고 만다. 

맥길 선교사 역시 귀국한 상황에서 후임으로 다른 선교사들이 사역을 이어갔고, 먼저 뿌려놓았던 복음의 씨앗이 각처에서 열매를 맺었다. 그러나 여성 사역을 맡아줄 여성 선교사의 부재는 매우 컸다. 바로 그때 2년 공백기를 가진 앨리스 샤프가 다시 공주로 돌아왔다. 

1908년 돌아온 앨리스는 작은 한옥에 살며 여성들을 위한 전도와 교육에 헌신한다. 충청지역 곳곳을 다니면서 전도했고, 사경회를 열고 성경을 가르쳤다. 교통이 불편한 지역을 다닐 때면 위험한 순간도 많았다. 여성들을 향해 누구보다 헌신적이었던 앨리스의 노력으로 마침내 큰 열매를 맺게 된다. 충청지역 여성 교인들이 남성 교인보다 많아지는 현상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앨리스 샤프의 충청지역 여성 전도사업과 교육사업’ 논문을 저술한 황미숙 박사에 따르면, 앨리스는 1915년 6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첫 안식년을 다녀온 이후 남녀 합동사경회가 개최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1917년 공주지역 교세 보고서를 보면, 여성 교인이 남성 교인보다 많아지고 있었다. 처음 공주에서 사역했던 때를 생각하면 놀라운 변화였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일제는 선교활동을 제약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충청지역 여성들 역시 상당한 압박을 받았지만 앨리스가 양성한 각 지역의 전도부인들은 굴하지 않고 복음을 들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엘리스 샤프 선교사는 1900년부터 1939년 추방될 때까지 조선의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헌신했다. 앨리스 선교사가 만동여학교 공사 현장을 둘러본 뒤 공사 상황 등을 메모장에 기록하고 있다.
엘리스 샤프 선교사는 1900년부터 1939년 추방될 때까지 조선의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헌신했다. 앨리스 선교사가 만동여학교 공사 현장을 둘러본 뒤 공사 상황 등을 메모장에 기록하고 있다.

소녀들을 가르친 어머니의 삶
앨리스 샤프의 사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교육이다. 학교 하나 없는 충청지역에서 앨리스는 1905년부터 어린 소녀 12명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08년 다시 방한해서도 소녀들을 가르치겠다는 열정은 여전했다. 

하지만 여자아이들을 배움터로 데리고 오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부모들은 교육에 관심이 없었다. 이제 곧 시집가면 쓸모없을 공부보다 집에서 일을 돕고 살림을 배우는 것이 낫다는 사고가 팽배했다.

앨리스는 우선 1905년 충청지역 최초의 학교 공주 영명학교의 전신 명신여학당을 설립해 여학생들을 가르쳤다. 공주뿐 아니라 강경, 논산, 태안, 아산, 천안, 홍성, 진천, 청양, 예산 등 20여 개 이상 학교를 설립해 여학생들을 입학시켰다. 7곳의 유치원을 세우기도 했다. 
앨리스는 전도여행을 다니다 보면 유난히 총명한 여자아이들을 만나곤 했는데, 부모들을 설득해 한글부터 가르쳤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앨리스를 어머니로 불렀고, 앨리스 역시 자식처럼 살뜰히 보살피는 양어머니가 되어 주었다. 앨리스가 병천지역 지령리교회(현 매봉교회)를 방문해 만난 똑똑한 여자아이가 바로 유관순이다. 

앨리스는 유관순을 수양딸로 삼아 공주 영명학교에서 공부하도록 도왔고, 2년 동안 가르친 후 이화학당에 편입시켰다. 이화학당에서 배우던 유관순은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모진 고민에 굴하지 않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던졌다. 유관순의 애국정신의 배경에는 첫 번째 스승이었던 앨리스 선교사가 있었다. 

앨리스는 일제에 의해 1939년 추방되기까지 40년을 조선의 복음화와 괄시받던 여성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사역했다. 우리나라 최초 여성목사 전밀라, 최초 여성경찰서장 노마리아, 중앙대 설립자이자 상공부장관을 지낸 임영신 등 여성지도자들은 앨리스의 제자이다.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앨리스는 자신의 선교지 한국을 위한 관심과 기도를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캘리포니아에 요양원에서 여생을 보내던 중 1971년도에 100세 생일을 맞았고 닉슨 대통령과 레이건 주지사가 축하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앨리스는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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