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기독교대한감리회는 일본 고베에 안장되어있는 윌리엄 벤처 스크랜턴 선교사(William Benton Scranton, 1856~1922, 한국명:시란돈)의 유해를 한국으로 이장하겠다고 발표했다. 아직까지 성사되진 못했지만, 비운의 선교사 또는 잊혀진 선교사라고 여겨지는 스크랜턴을 조명하겠다는 의지였다.
스크랜턴은 1885년 어머니 매리 플래처 스크랜턴 선교사(Mary Fletcher Scranton, 1832∼1909)와 함께 방한한 감리교 선교사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와 함께 입국해 대단한 선교 유산을 남겼지만, 그간 감리교회조차 그를 제대로 기억하고 평가하지 못해왔다. 그는 조선에서 선교사역을 마치고 일본 고베에 정착해 살다 쓸쓸하고 외로운 죽음을 맞았다. 이제라도 한국교회는 그의 삶과 사역을 더 깊이 조명하고 기억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어머니와 아들, 함께 선교사 파송
의사이자 목사 선교사로 조선에서 사역했던 윌리엄 벤처 스크랜턴은 사실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 수 있었다. 미국의 명문 예일대와 뉴욕 의과대학을 졸업한 수재였으며, 외가는 여러 감리교 목회자들을 배출한 신앙 명문가였다. 사업을 하던 부친 덕에 경제적으로도 부유한 그가 선교사로 헌신한 데는 배경이 있다.
상류층이면서 엘리트로 자란 스크랜턴은 1856년 미국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에서 출생했다. 부족함 없이 자란 유소년기 아버지가 42세 나이에 일찍 죽고, 그 이듬해 뉴헤이븐 시의원을 지낸 할아버지까지 사망하면서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하다. 어머니 매리 스크랜턴 역시 큰 슬픔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사별로 인한 공허를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은 신앙에 있었다.
특히 해외 선교를 열정적으로 후원하던 매리는 어느 날 로버트 매클레이 박사의 설교를 듣게 된다. 1884년 조선을 방문했던 매클레이로부터 조선 선교가 가능하다는 도전을 받는다. 조선에서 매클레이는 김옥균을 통해 고종으로부터 선교사 파송을 허락받았던 것. 직접 선교보다는 병원, 학교 등 간접 선교를 염두에 둔 고종의 승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 감리회의 동아시아 선교를 책임지고 있던 해리스가 매리를 만나 조선 선교를 다시 도전했다. 의대 졸업 후 막 결혼과 개업까지 한 윌리엄과 아내는 선교사로 나가길 거절했다. 그러다 윌리엄이 장티푸스에 걸려 죽을 고비를 이겨낸 후 생각이 달라졌다. 자신의 목숨을 살려주신 주님을 위해 조선으로 향하기로 결심했다.
미 감리회는 1884년 10월 윌리엄 스크랜턴을 조선에 보낼 첫 파송 선교사로 인준하고, 목사로 안수했다. 53세의 어머니 매리는 감리회 해외여선교회로부터 개별 파송을 받아 독립적인 사역을 하게 된다.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선교지 조선으로 함께 떠나게 된 것이다.
서민들을 찾아 ‘시약소’ 개소
윌리엄 스크랜턴이 먼저 파송을 받았지만, 익히 알려진 것처럼 1885년 4월 5일 제물포항에 처음 도착한 감리교 선교사는 헨리 아펜젤러였다. 스크랜턴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한 배 안에서 아펜젤러를 처음 만났고, 일본에서 함께 조선 사역을 준비하며 먼저 아펜젤러 부부가 조선으로 들어가기로 합의했다. 갑신정변 직후 정국이 혼란한 상황에서 내린 조심스런 접근이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했지만, 미 공사관은 서울 입경에는 난색이었다. 언더우드는 입경을 강행했지만, 임신한 아내를 동반한 아펜젤러는 닷새 만에 일본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조선으로 가는 책무는 윌리엄에게 주어졌다. 의사였던 탓인지 미국 공사이자 의료 선교사였던 알렌은 의료 선교사로 온 스크랜턴을 직접 마중 나올 정도로 반겼다. 알렌의 도움으로 서울 정동에 정착하며 제중원에서 진료를 보기 시작했고, 곧 아펜젤러 부부, 어머니 매리 스크랜턴, 자신의 가족들이 조선에 들어올 수 있도록 안내했다. 윌리엄은 이후 의료선교 사역을 위해 정동에 땅을 마련했고, 어머니는 여학교 설립을 위한 부지를 구매해 본격적인 선교사역 채비를 마쳤다.
우선 윌리엄은 자신의 거처에 진료소를 마련했고, 9개월 만에 500명이 넘는 환자가 몰릴 정도로 성과가 컸다. 정부 지원으로 설립된 제중원보다 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찾아 왔고 성심성의껏 진료를 보았다. 1년 동안 받은 진료비가 34달러에 그칠 정도로 그는 거의 대부분의 환자를 무료로 진료했다.
독자적인 병원 운영으로 그는 1886년 ‘시약소’라는 이름의 진료소를 열었다. 지금 정동제일교회 문화재 예배당이 바로 그곳이다. 이듬해 4월에는 고종이 직접 ‘시병원(施病院)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기도 했다. 물심양면 환자를 돌보는 어느 외국인 의사에 대한 소문으로 자자했고, 황제까지 그의 섬김을 인정해 병원 이름을 내려주었다. 같은 시기 매리 스크랜턴은 이화학당을 열어 여성교육을 펼치고, 최초의 여성 전용병원 보구녀관도 설립했다. 이화학당도 고종이 내려준 이름이다.
이제 안정적인 병원 사역에 매진할 수 있게 되었지만, 윌리엄은 안주하지 않았다. 주로 양반이 거주하던 정동에서 벗어나 전염병으로 목숨이 경각에 달린 백성들을 찾아 나서겠다며 ‘선한 사마리아 병원’ 프로젝트를 추진하기로 했다. 그는 주로 서민과 빈민들이 살던 애오개와 상동 일대로 향했고, 그곳에 다시 시약소를 열었다. 외국인에 대한 오해와 경계는 그의 헌신적인 진료로 허물어졌다. 아현교회, 상동교회, 동대문교회가 당시 윌리엄의 헌신적인 섬김으로 설립될 수 있었다. 스크랜턴 모자는 선교를 위한 아름다운 동역을 끝까지 이뤄냈고, 조선에서 아들 윌리엄은 어머니 매리를 존경하고 따르는 효자였다.
친일 비판하다 쓸쓸히 퇴장
윌리엄 스크랜턴은 사역 중에 뜻하지 않은 난적을 만난다. 미국에서 스크랜턴 모자의 파송을 적극 격려했던 해리스였다. 30년 넘도록 일본에서 사역한 해리스는 1905년 방한해 노골적으로 친일 행적으로 보였고, 스크랜턴은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며 충돌했다. 강한 힘을 가진 해리스는 스크랜턴의 지위를 격하시켜버렸고, 윌리엄의 입장은 공동체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늘었다.
결국 스크랜턴은 1907년 미국 선교본부에 사임의 뜻을 밝혔고, 자신이 담임하고 있던 상동교회에서 열린 연회에서 사임이 최종 결정됐다.
감신대 이덕주 교수는 “자원 사직이었지만 직속상관 해리스 감독과 갈등, 미국 선교본부와 동료 선교사들로부터 지지받지 못한 상태에서 이뤄진 퇴장이었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그의 사직을 배반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사임 이후 그는 조선에 남아 여전히 의사로서 곳곳에서 활동하다 1916년 사위가 외교관으로 있던 중국 다롄을 거쳐 1917년 일본 고베에 정착했다. 그곳에서도 윌리엄은 형편이 어려운 조선 노동자들을 위한 진료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투병 생활을 하던 그는 안타깝게도 1921년 교통사고를 당해 1922년 3월 23일 65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의 묘지는 1992년 일본 메이지대 서정민 교수가 고베외국인묘지에서 발견하기 전까지 누구도 위치를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