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마음에 조선을”…조선을 가장 잘 이해한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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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마음에 조선을”…조선을 가장 잘 이해한 선교사
  • 이인창 기자
  • 승인 2024.06.20 10: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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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 ‘선교사 열전’ ⑬ 복음의 조선화 ‘제임스 스카스 게일’

현대 국어국문학자들이 근대국어를 연구하기 위해 반드시 찾아서 읽어볼 수밖에 없는 책들이 있다. 고소설이나 시조, 구비문학 같은 고전문학을 구한말 당대 언어로 기록한 저서들이 있다. 그런데 이 책을 기록한 인물이 벽안의 이방인이다. 주인공은 바로 캐나다 출신의 제임스 스카스 게일(James Scarth Gale, 1862~1937) 선교사이다. 조선말로 그의 이름은 ‘긔일’ 혹은 ‘기일’이다. 

이 땅을 밟았던 선교사 중 게일 선교사만큼 당시 조선의 문화와 관습, 언어와 문학을 넓고 깊게 이해한 선교사는 아마 없을 듯하다. 그가 다양한 방면에서 조선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근원은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해야 한다는 사명 때문이었다. 조선에서만 무려 40여년 동안 헌신했던 게일 선교사가 없었다면, 아마 지금의 한국교회의 문화도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 그만큼 초창기 선교 역사에서 그의 역할은 특별했다.

바닥부터 조선을 배우다
캐나다 온타리오주 농촌에서 태어난 제임스 게일 선교사는 토론토대학을 졸업한 후 25살 나이에 토론토대YMCA 선교부 파송을 받아 조선 땅으로 향했다. 1888년 부산을 통해 입국한 그는 이 땅에 들어온 최초의 캐나다 선교사이다. 입국 당시 예수교 금교령이 내려진 엄중한 상황에서 서울에 올라왔던 게일 선교사는 이내 황해도 소래교회로 향했다. 그곳에서 3개월 동안 조선 사람들의 생활 양식에 따라 적응하면서, 완벽한 ‘조선화’에 도전했다. 외국어를 사용할 수 없는 환경에서 조선어를 밑바닥부터 익혔다. 

물론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시작했으며, 이후 한반도 전역을 다니면서 조선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기록과 사진으로 남겼다. 그는 무려 27번이나 한반도를 순회하면서 조선에 대한 이해의 폭을 스스로 확장시켰다. 심지어 개고기와 홍어를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적응했다.

조선에서 사역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캐나다 파송 선교부가 해체되면서 선교비가 끊기는 위기도 있었다. 사무엘 마펫 선교사는 그의 사정을 알고 도움을 주었고, 1891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소속으로 옮길 수 있었다. 이것을 계기로 1897년 미 북장로교에서 목사안수까지 받을 수 있었다. 

1900년 다시 서울에서 사역을 시작한 게일 선교사는 서민들이 많이 살던 곤당골에 방을 하나 얻었다. 누구든 방문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췄고, 마을 남자들은 이곳에서 담배를 태우며 소통했다. 게일 선교사는 자연스럽게 대화하면서 사람들이 찾아와서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도왔다. 같은 해 그는 연동교회 제1대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조선과 서양을 잇는 번역가
제임스 게일 선교사는 조선의 독자적이고 유구한 5천 년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게일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하나님’을 적용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나님’이 조선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하늘님’과 같이 다신적 의미를 담고 있어서 적절하지 않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게일 선교사는 ‘하ᄂᆞ님’을 사용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좀체 물러서지 않았다. 이미 조선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하ᄂᆞ님’이야말로 성경 속 ‘야훼’ 또는 ‘아도나이’를 이해하도록 하는 최고의 용어라는 판단이었다. 

미국 UCLA 옥성득 교수(한국기독교사)는 “상동청년학원 교사였던 한글학자 주시경이 ‘하ᄂᆞ님’ 어원에 ‘하나’라는 요소가 있다고 주장했고, 게일이 이 해석을 받아들였다. 게일은 ‘유일하신 위대한 창조주’를 설명할 수 있는 용어로 ‘하ᄂᆞ님’이라는 내용을 선교사들에게 소개했고, 지금까지 한국 개신교의 공인된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조선의 역사와 문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다양한 저술로 연결됐다. 그는 ‘전환기의 조선’을 비롯해 9권의 영문책, 30여권의 국문책을 비롯해 수많은 논문 등을 집필했다. 춘향전, 흥부전, 숙영낭자전, 홍길동전, 구운몽  등 무수히 많은 고전문학을 영어로 번역했다. ‘동국통감’도 번역해 한민족의 역사를 서양에 소개했다. 

게일 선교사는 국문 번역에도 탁월했다. 1892년 그가 간행한 ‘사도행전’은 마펫 선교사가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성경번역위원회에서 활동하며 ‘구역 성경’ 번역에 큰 역할을 했고, 이후 성경 개역 과정에서 다른 선교사들과 원칙이 달라 번역위를 이탈하기도 했다. 그는 1925년 개인 차원에서 번역 오류를 수정해 구역 성경 개정본을 발간할 정도로 언어에 있어서 탁월했다. 그는 한문을 익히기 위해 매일 2시간씩 한자 공부를 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1897년 간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한영사전도 게일의 작품이다. 게일은 3차에 걸처 한영사전을 개정했고,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한영사전은 여전히 게일의 사전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보다 앞선 1895년에는 영국의 작가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번역해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하기도 했다. 게일의 천로역정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번역소설이다.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한성감옥에 수감 중이던 우남 이승만, 월남 이상재 같은 지사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길선주 목사 역시 천로역정을 읽은 후 회심하기도 했다. 

1923년 제임스 게일 선교사의 환갑잔치 당시 서양 사람들이 한복을 입고 참여하고 있다. 게일은 한국의 문화와 역사까지 사랑했던 선교사였다. 

끝까지 조선을 사랑했다
게일 선교사는 1900년부터 1927년까지 연동교회 제1대 담임목사로 시무했다. 목회하면서 교육에 관심을 갖고 연동여자소학교, 예수교중학교 등을 설립해 젊은 인재를 길러내고자 했다. 황성기독교청년회 설립을 지원하고, 조선의 청년들이 유학을 떠날 수 있도록 적극 돕기도 했다. 특히 게일은 젊은 시절 이승만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미국에서 공부하도록 주선했다. 

원산대부흥운동의 주역 하디 선교사와도 가까웠던 게일은 원산에서 사역하기도 했다. 게일은 성령의 역사로 변화하는 하디를 지켜보았다. 그의 책 ‘전환기의 한국’에서는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의 발단과 전개를 기록으로 남겼다. 백만일구령운동 전개 당시 게일은 의장으로 피선되기도 했다. 

그러나 게일 선교사는 일제와 관련한 정치적 개입을 꺼렸다. 미국 정부가 외교적 부담 때문에 선교사들의 정치적 활동을 제한하고자 했고, 파송 선교부에서도 정치 불개입 원칙을 요구했다. 오히려 한때 게일은 총독부와도 우호적 관계일 정도로 가까운 편이었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사역이 정치적인 문제로 위협받길 원하지 않았다. 추방당하지 않고 조선에 남아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본 모습을 본 게일은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이싼 3세’라는 필명으로 일제 치하 조선 민중의 고난을 영문으로 고발하는 기고글을 쓰기 시작했다. 서양 국가의 외교적 개입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게일은 비록 일제 치하에 있지만 우수한 문화를 가진 조선이 일제에 영구히 복속될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1923년 게일의 환갑잔치 사진을 보면, 서양 사람들이 한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다. 조선의 풍습을 따라 환갑잔치를 열 정도로 조선을 사랑했던 게일. 그는 1927년 연동교회를 사임하고 선교 사역을 마무리한 후 영국으로 떠났다. 1908년 첫 아내 해티 헤론과 사별한 후 1910년 재혼한 루이스 세일 아다의 고향이 영국이었다. 그는 영국 바스(Bath)에서도 왕성하게 활동하다 1937년 74세를 일기로 삶을 마쳤다. 게일이 이 땅을 떠나며 남긴 마지막 말에서 그가 얼마나 조선을 사랑했는지 느낄 수 있다. “내 언제까지 내 마음에 조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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