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속 인물 : 양우로더 선교사
상태바
교회사 속 인물 : 양우로더 선교사
  • 승인 2004.12.05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성 기독인 배출 교육에 평생 헌신

실패한 결혼생활 이후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교회설립과 여성 전도 그리고 여학교를 세우며 경영에 일생을 바친 한국기독교 초창기 여사역자, 양우로더 선교사. 그녀는 여성의 몸으로 교회개척과 지원에 열성을 다했을 뿐만 아니라 여학교 설립을 통해 여성권익 증진과 복음화에 일익을 담당한 초대교회의 일꾼이었다. 이것은 순전히 복음의 힘이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의 힘이었다.

1877년 서울 양반집에서 출생한 그녀는 남동생이 배재학당에 다닐 정도로 어느 정도 개방된 환경에서 자란 것으로 전해진다. 19세에 결혼했지만, 그의 결혼은 궁핍과 갈등으로 좌절을 피할 수 없었고 하지만 동생의 권유로 나온 상동감리교회의 생활 때문에 그녀의 생활은 이제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게 됐다. 당시 전덕기목사에게 세례를 받은 그녀는 이름을 ‘우로더’라고 새롭게 고치고 신앙의 삶, 결코 쉽지 않은 그러나 소망을 주는 인생의 첫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양우로더 선교사는 스크랜튼 부인이 가르치는 성경학원에 들어가 교육받으며 복음과 한글, 우리나라 역사 등에 대해 눈을 떠갔다. 성경학원은 나중에 ‘부인성서학원’으로 정식 출범했다. 그녀는 교육받으며 서울 남대문 밖에 ‘연화봉학교’를 세웠다. 여자아이 4-5명으로 시작한 이 학교는 미국선교사들의 후원으로 잘 운영돼 지교회를 세울 정도가 됐다.

부인성서학교 1회 졸업생인 그녀가 졸업 후 6개월 동안 학생들을 지도하여 남긴 공적은, 새신자 187명, 비신자전도 730명, 교인상담 9611명 등이다. 밭은골교회, 염창교회, 창의문밖교회 설립은 그녀의 전도로 이루어진 결실이었다.

이같은 공로를 인정한 미국감리교는 만주에 파송할 여사역자를 물색하던 중 바로 양로우더를 주목하고, 그녀를 선교사로 임명한다. 파송받은 그녀는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열정적으로 복음전도에 힘써 ‘보호여회’조직에 성공을 거두었다. 3년 동안의 사역결과였다.

귀국한 양로우더 선교사는 연화봉여학교가 재정난에 허덕이는 것을 보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학교에 기부하는 등 학교살리기에 온 힘을 쏟아 부었다. 성서학원 출신 부인들을 규합, ‘40명 친목회’를 구성하며 학교를 지원, 든든하게 기초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이 학교가 바로 지금의 ‘신광여자중고등학교’이다. 그녀는 일제말의 어려움을 체험하며 1943년 23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숨을 거두었다.

윤영호기자(yyho@ucn.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