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 자신이 계시해 주신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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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 자신이 계시해 주신 이름
  • 박찬호 교수(백석대 조직신학)
  • 승인 2024.06.26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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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교수의 목회현장에 꼭 필요한 조직신학 62) 하나님 아버지
박찬호 목사
박찬호 목사

한분 하나님의 존재를 긍정하는 기독교인들이 초대 교회 시대에 자신들의 통치자들인 로마의 당국자들에게 무신론자라는 혐의를 받았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줄잡아 로마에는 30만의 신이 있었다고 하는데 기독교 신앙은 이들 신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던 로마가 내놓은 타협안은 기존의 30만의 신도 인정하고 거기에 자신들의 신을 추가하라는 다신론적인 회유책이었다. 이런 다신론적인 체계 안에서만이 로마 황제 숭배가 용인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들의 주님되심을 고백하였다(고전 12:3).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이 이들 민족보다 뛰어난 점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가지고 있던 개방적인 성향이었으며, 로마인의 진정한 자기 정체성을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개방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로마인이야기 1권 294). 시오노 나나미는 일신교와 다신교의 차이는 단순히 믿는 신의 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남의 신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에도 그 차이가 있다고 지적한다. 결국 “남의 신도 인정한다는 것은 곧 남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이다”라고 시오노 나나미는 주장하고 있다(1권 58). 일본에는 줄잡아 8백만의 신이 존재한다고 한다. 로마보다 훨씬 많은 숫자라고 할 수 있다.

진화론이 등장한 19세기 이후로 종교에서도 일종의 진화가 있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한 마디로 다신론에서 유일신론으로, 유일신론에서 삼위일체론으로 신론에 있어서도 진화와 유사한 하나의 발전이 있었다는 것이다. 분명 성경의 계시에도 모종의 발전이 있음을 우리는 부인하기 어렵다. 소위 말하는 점진적인 계시(progressive revelation)를 우리는 인정할 수 있다. 삼위일체에 대한 계시가 구약 성경에서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신약 성경에서 보다 분명히 개진되고 있음이 그 실례가 될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성경 자체의 증거로 보아도 일종의 계시의 발전이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구약 시대의 성도들보다, 심지어는 예수님 당대의 성도들보다 지금 우리는 더 밝은 계시의 빛 가운데 거하고 있다.

하지만 다신론에서 일신론으로 발전했다는 설명보다는 일신론에서 다신론으로 타락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인류는 자신들이 원하는 신을 자신들의 욕심을 따라 만들어내는 위험에 끊임없이 노출되었고 지금도 노출되어 있다. 우리는 자신의 탐심을 따라 우상을 만들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탐심은 우상숭배”(골 3:5)라는 성경의 지적은 너무도 정확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신에 명칭을 부여한다. 이 만들어진 신의 가장 일반적인 이름은 ‘맘몬’(mammon)일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가 하나님께 지어준 이름이 아니다. 하나님 자신이 계시해 주신 하나님 자신의 이름이다. 우리의 문화권에서는 윗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으려는 지난한 노력이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우리가 꽃을 명명할 때 그것은 꽃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께서 비로소 하나님 되시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계시하신 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 거기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다. 하나님 편에서의 자신을 낮추심이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과 보호하심을 경험하게 된다.

여성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불가해성(incomprehensibility)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시는 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이나 이름을 제대로 알 수 없다. 기껏해야 우리는 유비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신성의 어떤 측면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이 아버지라는 표현은 절대적일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어머니라 부르지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아버지나 어머니라는 표현은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인 하나님에 대한 극히 제한적인 언급일 뿐이다. 그렇다면 여성에 대한 차별을 조장한 가부장적인 하나님의 이름인 아버지라는 말은 어머니로 대치되어야 한다. 이상은 여성신학의 주장인데 이는 일면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주장은 자신을 남성적인 유비를 통해 계시하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아버지라는 남성적인 유비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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