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5: 5~6>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코로나 바이러스로 9주째 온라인 예배를 드리고, 모든 강연과 만남이 정지된 상황에서 작가인 내가 할 수 있는 분명했다. 글쓰기와 성경과 신앙서적을 읽고, 유튜브를 통해 국내외의 좋은 설교와 강의를 많이 듣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기독교방송 프로그램 중에서 모범이 되는 신앙인들의 간증 프로그램도 즐겨 보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마음이 불편했다. 거의 모든 목회자들과 구원의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 분들의 공통점 중 하나가 ‘기도 중 하나님의 음성을(또는 음성이라고 할 수 있는 듯한 느낌의 소리) 들었어요.’ ‘절망의 순간에 다 포기한 순간, 예수님의 모습 같은 것이 보였어요.’ 이런 비슷한 간증을 들려주었다. 이것이 나를 참 힘들게 했다. 나는 뭐지? 라는 의문은 마침내 “그래, 어느 선교사님 말씀처럼 내가 ‘죄장아찌’ 같은 인간인데 나처럼 더러운 인간에게 거룩한 예수님이 나타나실 리가 있겠는가!”라는 초보 중의 ‘상초보’ 같은 생각이 들게 했다. 사실, 이런 생각은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니다. 5살 때부터 시작된 나름 오랜 여정의 시간 속에서 남들이 ‘예수님을 보았다. 목소리를 들었다’ 하면 얼마나 부러워했는가! 그래서 나도 온갖 선행과 고행 비슷한 것을 흉내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내 무능함만 확인하고, 내 죄는 완전히 씻어지려면 멀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지난달에는 한 방송의 간증 프로그램에 나온 젊은 연예인의 신앙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하나님을 믿는 것도 아니구나...’라는 생각으로 얼마나 슬퍼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런 내가 불쌍해보이셨는지 이번 4월 15일, 첫 번째 사건이 일어났다. 새벽에 혼자서 예배를 드리며 찬송가(163장 ‘할렐루야, 할렐루야’)를 부르다가 4절 가사 때문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주 뵙지 않고 믿는 자, 그 믿음 아름다워라, 영원한 생명 얻으리…’ 나는 참 미련한가 보다. 이와 같은 말씀이 성경에 수없이 나오는데, 초등학생들도 다 아는 건데… 왜 이제야 이 말씀이, 그것도 찬송가 가사가 내 마음을 뒤흔드는지!
두 번째 사건은 4월 16일 새벽에 일어났다. 부활절 기념으로 요한복음을 3번째 정독할 때였다. 여기서 ‘3번째’라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나의 어리석음을 증명하는 횟수이므로. 이제 20장, 21장을 읽으면 ‘3번째’ 정독을 마치는 것이다. 그런데,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 중략…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 27~29).
나는 너무 기뻐서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방안을 빙빙 돌다가, 베란다로 나가서 문을 활짝 열었다. 아직 검은 하늘에는 반달로 되어가고 있는 노오란 달이 떠 있고, 세상에는 나 혼자만 남은 듯 고요했다. 자동차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차갑지만 상쾌함이 넘치는 새벽 기운이 내 온 몸을 휘감았다. 그 순간, 요한복음 1장 말씀이 떠올랐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바보야! 너는 정말 바보야!” 나는 스스로에게 마구 욕(?)을 했다. 그런데 자꾸 웃음이 났다. 도대체 내가 요한복음을 얼마나 많이 읽고, 쓰고, 암송하고, 잘하지 못하는 영어로 외우고 했는데! 주석과 강해 책도 수없이 읽고 설교도 듣고 했었잖아! 이 바보야! 사회적 거리두기 라는 허울만 없었다면 온 동네를 달리고 싶었다.
마치 한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과 매일 만나면서, 아니 살면서 ‘나는 혼자 산다, 나도 사랑하는 남자와 살고 싶다’라며, 매일 울고, 몸부림치고, 자신을 학대하고, 심지어는 나 같은 여자는 살 가치가 없는 쓰레기라고 한다면 그 여자는 정신이 이상한 정도가 아니라 귀신에 씌웠다고나 하지 않을까? 내가 바로 그런 여자이었던 것이다.
자주 부르는 찬송. 늘, 늘, 늘!!! 늘 읽고 묵상하는 말씀. 그런데도 남들이 예수님을 보았다, 목소리를 들었다는 소리에 내 신랑되신 예수님은 아예 존재조차 모르고 남의 신랑만 부러워했던 바보! 아니, 시편 73편의 말씀처럼 ‘어리서고 우매하여 짐승같은’ 내가 아니었던가! 웬만한 간증이야기는 귀에도 안 들어올 정도로 신비한(?), 기적 같은 간증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나의 이런 이야기가 너무 누추하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왜 이리 기쁜지!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하나님은 정말 너그럽고 자상하며 세심한 분이시다. 왜냐하면 4월 17일, 3번째의 선물을 주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