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장 백석과 대신총회의 역사에는 유사점이 있다. 신학교가 먼저 세워진 후 교단이 창립된 점이다. 또 하나의 유사점은 대한신학교나 백석대 전신인 방배동 총회신학교 모두 총회 직영신학교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대신총회는 신학교 문제로 수없는 갈등을 빚어왔다. 반면 백석총회는 신학교와 인준관계 속에서 성장했지만,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은 총회의 신학과 맥을 같이하며 나날이 발전을 거듭해왔다. 학교와 총회가 서로 시너지효과를 내며 상승하고 있다. 물론 백석총회에는 신학교 설립자가 건재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는 점이 주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백석총회의 교단 통합 역사를 정리하는 시점에서 신학교 문제를 다시 거론하는 것은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기술하기 위함이다. 통합 조건으로 항상 거론된 신학교 통폐합 문제는 늘 백석 신대원이 이름과 기득권을 포기하는 형태로 논의됐다. 백석 신대원의 역사는 한마디로 ‘내려놓음’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학교 측’이 계승한 대신총회
대신총회의 아픈 손가락은 ‘신학교’다. 50년 넘는 교단 역사 속에서 ‘신학교 문제’가 대두되지 않은 적이 거의 없을 정도다. 그런데 대신총회의 역사와 자긍심 속에는 ‘신학교’라는 세 글자가 자리하고 있다. 왜냐하면 대신총회는 1968년 교단 분열 당시 ‘신학교 측’의 역사를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대신총회와 신학교의 역사를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자. 김치선 목사가 대한신학교를 세운 것은 남대문교회(현 통합 소속) 담임 시절이었다. 전쟁 후 생업에 바쁜 신자들이 자신의 일을 마치고 늦은 저녁이라도 공부할 수 있도록 신학의 길을 열어 놓겠다는 것이 김치선 목사의 뜻이었다. 하지만 야간 신학으로 세워진 대한신학교는 장로교 총회의 텃세에 밀려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대신총회 50년사>에는 “총회에서 강도사 고시를 볼 때나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할 때 대한신학교를 졸업한 후보생들을 일부러 떨어뜨렸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떨어진 목사 후보생들은 김치선 목사를 찾아와 “우리 교단을 만들어 나가자”고 요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치선 목사는 ‘분리주의자’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합동과 통합의 분열을 목도하면서 1961년 3개의 조직교회와 함께 대신교단을 창립하게 됐다.
대신총회는 ‘자생교단’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대신의 역사는 미국 국제기독교연합인 ICCC가 설립한 성경장로교회의 한국 총회 형식으로 출발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1961년 정권을 장악한 군부세력은 ‘1교단 1신학교’ 원칙을 세웠다. 총회가 없이는 신학교 운영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산에 있던 대한신학교 부지를 군부에 빼앗겼다. 하는 수 없이 김치선 목사는 ICCC의 지원을 받아 용산구 서계동에 있는 제정 러시아 영사관 건물을 구입해 신학교를 이전했고, ICCC는 대한신학교 이전비용과 운영자금을 지원하는 대신에 한국에 성경장로회를 설립할 것을 요구했다. 이렇게 서로 필요가 잘 맞아 떨어져 청파동 캠퍼스와 대신총회가 세워졌다.
대한신학교가 총회 직영으로 운영된 것은 성경장로회총회가 세워진 1961년부터 약 7년에 불과하다. 1962년 문교부 허가를 받은 대한신학교는 ‘학교법인 성경장로회’라는 명칭으로 등록됐고, 마두원 선교사가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해외 선교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김치선 목사의 생각은 달랐다. 대한신학교를 설립한 만큼 애착이 컸고, 1966년 자신의 아들에게 신학교 교장직을 물려주면서 선교부로부터의 독립을 모색했다. 이때부터 선교부와 신학교 측의 갈등이 시작됐다.
1967년 12월 17일자 <주간 한국>에는 대한신학교 갈등이 다음과 같이 기사화 됐다.
“한 졸업생에 두 졸업식- 지난 12일 서울 용산 서계동에 있는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 신학교에서는 교권(敎勸)과 교권(敎勸)의 싸움으로 23명의 졸업생이 두 곳으로 갈라져 신학교는 같되 교명과 교장명이 다른 졸업장을 받아든 당대의 희한한 졸업이 있었다. 한 교파의 한 학교법인 아래 두 신학교가 생겨 졸업생 쟁탈전이 벌어진 셈이다.”
신학교를 둘러싼 싸움은 1968년 교단 분열로 막을 내렸다. 마두원 선교사는 ‘성경장로회신학교’라는 명칭의 학교를 새롭게 시작했고 교단은 갈라졌다. 대한신학교 소유권은 김치선 목사가 확보했고 교단은 ‘성장총회’를 거쳐 1972년 ‘대신총회’가 됐다.
대신총회 목회자들이 대한신학교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나타내는 것은 ‘신학교’를 중심으로 총회의 역사를 계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신학교 전통을 계승한 대신총회는 80년대 대한신학교의 부도와 90년대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와의 결별 등 끊임없는 부침에 시달려야 했다. 1998년 안양 석수동에 세워진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는 총회직영으로 운영하던 총회신학(연구원)을 옮겨놓은 것으로 총회 재산을 기탁해 세워진 정규인가 대학원이었다. 그러나 석수동 대학원대학교 설립 후 대신총회 안에서는 고소고발 사건이 발생하고 학교 운영을 교단 이외의 인물이 맡는 등 큰 상처를 입게 된다. 대학원과 결별하면서 어렵게 마련한 안양 총회관도 사라졌다. 90년대 중반부터 2015년 백석과 통합할 때까지 대신총회는 총회관과 신학교 문제로 내홍에 시달렸다.
기독신학, 합동정통총회에 헌납하다
한 교단의 건강과 안정을 유지하는 데는 크게 신학교와 총회관이라는 두 기둥이 필요하다. 신학교는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을 담보하는 곳으로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를 양성하는 곳이다. 총회관은 단순히 건물을 상징하지 않는다. 총회의 행정과 선교, 개척과 교육 등 전반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하드웨어 역할을 감당한다. 그런 점에서 교단의 든든한 미래를 받치는 두 기둥이 ‘신학교와 총회관’이라고 할 수 있다.
백석총회는 두 기둥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신학교와 총회는 동반성장을 거듭했다. 모두 불가능하다고 여긴 총회관 건립 역시 불과 3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이뤄냈다. 고소고발이 없는 총회로 화합하는 가운데 성장을 거듭해왔다.
그런데 백석총회라고 해서 신학교 직영에 대한 염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백석총회는 1976년 대한복음신학교를 모태로, 1978년 대한복음총회를 설립하면서 출발했다. 당시 설립자 장종현 목사는 “교단 배경 없는 신학교육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신학교육에 사명을 두고 있다면 당연히 교단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신학교에서 목사후보생이 많이 배출될수록 총회도 성장한다. 백석총회 전신인 합동정통총회 역시 성장을 거듭했다. 그런데 총회가 커지면서 신학교 직영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1991년 총회장에 추대된 이종정 목사는 부총회장에 시무할 당시 지금의 신학대학원인 총회연구원을 직영신학교로 헌납할 것을 학교 측에 두 차례나 요청했다. 총회신학교는 1990년 11월 교육부로부터 ‘기독신학교’ 인가를 받았다. 학교가 성장하여 위상이 높아지고 영향력이 커지자 총회 산하 교육기관으로 두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총회신학교는 총회와 인준관계였다. 설립자이자 운영이사장이었던 장종현 목사는 이종정 부총회장의 요청에 고뇌하며 기도했다.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세우고, 15년 동안 안정적으로 운영해온 신학교를 총회에 고스란히 헌납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장종현 목사는 총회신학교를 합동정통총회에 헌납하기로 하고 신학교 이사회 의결 회의록과 총회신학교 헌납 공문을 총회에 제출했다. 공문을 접수한 총회는 1991년 3월 4일 실행위를 열어 신학교 인수를 위한 소위원회를 구성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장종현 목사는 “신학교 문제를 놓고 기도하던 중 하나님께서 네 것이 아니라 ‘내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의 뜻대로 쓰임받는 것이 옳다는 생각에 순종하게 됐다”고 회고한 바 있다.
헌납공문을 보내고 2개월 후인 1991년 5월 열린 실행위에서 신학교 운영권은 신학교에 그대로 두기로 결정했다. 총회가 신학교를 직영할 능력이 되지 않았고, 그동안 학교가 교단 신학에 맞추어 잘 운영하여왔기에 총회 직영이 불필요하다는 결론이었다. 당시 총회는 다음과 같은 회신을 신학교로 보내왔다.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금번 총회에서는 귀교의 총신학원 제29호(1991.2.25.일자)의 ‘신학교 헌납 건’에 대하여, 먼저 본 교단과 신학교를 위한 헌신적인 결단을 높이 치하하며, 위촉한 직영신학교 소위원회에서 3차에 걸쳐 심의한 결과 본 교단의 형편과 여건으로 보아 불가함으로 본 총회 실행위원회(1991.5.6.)에서 본 교단의 신학교 운영을 설립자 장종현 목사에게 반려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이에 통보하오니 주의 영광을 위해 배전의 노력을 주시기를 바라며, 향후 본 총회도 최선을 다하여 신학교의 발전을 위하여 협력할 것입니다. 아울러 총회신학교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장종현 목사는 “교단을 위해,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았으나 결과는 다시 나에게 학교가 반환됐다. “만일 나의 권한을 주장했더라면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며, 교단과 불편한 관계가 계속됐을 것”이라며 ‘내려놓음의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됐음을 고백했다.
2000년 통합 당시, ‘대한신학’으로 직영 합의
내 것이 아니면, 하나님의 뜻 가운데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은 이후 장종현 목사의 삶에 지표가 됐다. 교단 통합에 걸림돌이 된다면 마지막 남은 자존심까지도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 장 목사의 생각이다. 이런 ‘내려놓음’은 대신과의 통합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1999년 최낙중 목사가 총회장으로 시무할 당시 본격적으로 추진된 대신과의 통합은 1년 동안 통합추진위원회를 통해 상당한 의견 접근을 이뤄냈다. 하지만 대신과의 통합은 2000년 9월 총회에서 최종 무산된 후 2005년 다시 추진됐고, 또다시 무산된 후 2015년 전격적인 통합에 이르게 된다.
2005년 통합추진 당시 대신총회 안에서 “사실상 합동정통에 영입되는 것”이라는 표현이 나온 것으로 볼 때 대신이 주도권을 가진 통합추진은 1999~2000년이 마지막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사유화와 총회관 재정 문제가 불거진 2000년대 들어서 대신총회는 갈등이 심해졌다. 반면 합동정통총회는 신학교와 든든한 인준관계를 유지하며 성장을 거듭했다. 무엇보다 1995년 기독신학교는 ‘기독대학교’로 개편 인가를 받았고, 1996년 ‘기독신학대학원대학교’ 설치 승인을 받았으며, 천안으로 이전하여 ‘천안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한 후 종합대학교로 발전해가고 있었다.
1999년 대신과 통합이 추진되던 시기는 백석총회는 물론이고 학교도 큰 아쉬움이 없었다. 그런데 교단 통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신학교 통합도 함께 추진됐다. 방배동 신대원을 총회 직영신학교로 내놓는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본지가 입수한 2000년 7월 31일자 <공증서류>는 신학교 통합에 대한 상세한 합의를 담고 있다.
1. 의의 -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와 기독신학대학원대학교는 소속 교단들(대신, 합동정통)이 역사적인 통합을 결의함에 따라 아래의 통합 원칙에 의거 양 학교를 통합하고자 한다. 아래의 통합원칙은, 그동안 여러 장로교단 통합과정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신학교 통합과 관련하여 야기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하여 양 교단의 순조로운 통합은 물론 민족복음화 세계선교를 수행하는 참다운 선지학교를 세우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믿는다.
양 교단의 순조로운 통합을 위해 신학교가 먼저 통합을 하겠다는 합의였다. 이 합의는 ‘신학교 통합에 대한 합의서’라는 제목으로 법무법인 아시아를 통해 공증됐다.
통합원칙을 보면 당시 합동정통총회와 신학교가 교단통합을 위해 얼마나 많은 양보를 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2. 통합원칙 - (1) 학교법인 명칭 : 통합한 학교법인 명칭은 ‘학교법인 대한신학대학원’이라 칭한다. (2) 학교 명칭 : 통합한 학교 명칭은 법적인 절차가 완료된 후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라 칭하며,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는 통합총회의 유일한 직영신학교가 된다. 단,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가 법적으로 학교 명칭을 사용할 수 없게 될 경우는 기독신학대학원대학교라 칭한다. 또한 통합 이후에 교단적으로 다른 교단과 다시 통합하게 되는 경우 그 교단에서 운영하던 신학교는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에 통합하며, 별도로 목회자를 양성하는 직영신학교나 인준신학교를 추가로 두지 않는다.
당시 통합추진위원회는 교단 명칭을 ‘대신-합동정통’으로 한다는 것과 신학교를 통합하여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로 통일하는 것을 놓고 합의를 추진했다. 신학교 통합원칙에 잘 나타났듯이 교육부 인가를 받은 기독신학대학원대학교는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가 되는 것을 수용했다. 1991년 백석총회에서 신학교 헌납을 요청할 때 순종했던 기독신학교는 약 10년 뒤 대신과 통합을 추진하면서 총회 직영신학으로의 요청을 또 한 번 받아들였고, 명칭까지 대신으로 바꾸는 과감한 결단을 했다. 한 교단 안에 신학교 난립을 막기 위해 추가적인 통합이 이루어지더라도 직영 신학교는 하나만 유지할 것을 합의했으며, 학교 건물은 방배동 교사를 사용하도록 했다.
당시 이 합의는 대신총회장 김재규 목사와 대신 신학교 위원 이무웅 목사, 합동정통 총회장 손양도 목사, 합동정통 신학교 위원 장종현 목사가 서명했다.
안양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설립 후 재산상의 문제와 운영난에 봉착한 대신으로서는 최선의 합의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끝내 대신총회는 “교단 명칭까지 ‘대신’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고 2000년 9월 총회에서 통합은 무산되고 말았다.
늘 양보한 백석, “통합은 하나님의 뜻”
백석과 대신의 통합은 2015년 단 한번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김치선 목사의 제자인 최순직, 김준삼 박사가 방배동 신학교에 자리를 잡은 후 그의 제자들을 통해 수차례 타진됐다. 최순직 목사 생전에 두 차례, 그리고 1999년과 2005년에 이어 2015년까지 총 다섯 번의 추진 끝에 성사될 수 있었다. 통합 합의도 매번 비슷했다. △교단 명칭을 어떻게 할 것인가 △신학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임원 순서는 누가 먼저 할 것인가 등 사실상 신학이나 신앙적으로 크게 중요하지 않은 부수적인 것들이었다. 양 교단이 ‘역사적 개혁주의신학’을 정체성으로 선언하고 있고, 신앙의 보수성도 유사했기에 본질적인 갈등은 없었다. 다만, 인간적인 기득권을 누가 내려놓느냐의 문제가 걸림돌이 됐다.
역사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매번 통합이 추진될 때마다 백석총회는 많은 것을 양보했다는 점이다. 대신보다 교단 규모가 작았을 때는 물론이고, 대신을 초월하여 한국 장로교 안에서 상당한 규모의 교단으로 성장한 후에도 기득권을 앞세우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폐쇄된 독선과 아집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연합한다”는 것이 교단 합동의 목적이었고, “이러한 통합은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늘 고백해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