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24>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12월 28일, 인터넷에서 뉴스를 검색하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26일(이 날은 내 생일이었다) 경기도의 한 동네에서 5학년 여학생이 같은 나이의 여학생을 죽인 것이다. 그러나 더욱 내 온몸을 부르르 떨게 한 것은 아래와 같은 기사 내용이었다.
-A양은 경찰조사에서 ‘내 부모님이 이혼했다고 B양이 자신이 다니는 학교에 소문을(사건 발생 한 달 전부터 소문을 냈다고 함) 퍼뜨렸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두 소녀는 서로 다른 초등학교에 재학 중이었지만 같은 교회를 다니면서 알게 됐다.-
정리하면 두 아이는 분명 다른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서로 알 턱이 없었다. 하지만 ‘같은 교회’를 다니기에 친분이 생기게 됐을 것이다. 나는 이 기사를 비기독인들이 보고 얼마나 우리들을 조롱하고, 비난하며 결국에는 교회와 예수님을 향해 침 뱉을까 …, 가슴이 벌렁거리기까지 했다. 먹잇감을 찾느라 사자처럼 두 눈에 불을 켜고, 어슬렁어슬렁 우리 주위를 빙빙 맴도는 그들에게 이런 기사는 물고 뜯기에 기막힌 식사감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보다 더 나를 괴롭힌 것은 죽은 아이나 죽인 아이나 ‘같은 교회’ 즉 ‘같은 주일학교’에 다녔다는 사실이다.
생각이 났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주일학교 공과공부나 예배시간 현장이. 나 역시 내 형제들과 함께 주일학교를 통해서 어린이청소년기를 보냈다. 그 당시는 교회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질 정도였다. 신앙은 물론 문학과 각 분야의 예체능, 인간관계, 어울려 살아가는 다양한 문화체험과 사회의식, 심지어는 맛나고 풍성한 간식거리까지!
하지만 시간이 흘러 이제 교회 주일학교는 학원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초라한 취급을 받고 있다. 1순위가 학원, 그 다음이 놀이와 게임 공간, 그 다음은 학교, 마지막은 교회일 정도가 아닌가.
물론 아직도 주일학교를 위해 온 몸이 부서져라 수고하고, 눈물로 무릎을 적시는 분들이 많다. 그렇지만 중세 가톨릭 시대처럼 ‘금과 은’ 즉 ‘교회학교에 붓는 재정과 프로그램’은 눈부시지만 ‘예수이름’ 즉 ‘말씀의 생활화’는 점점 지푸라기처럼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지면에서 그저 주일학교 자체를 비난비판하기보다 더 시급한 것이 있다.
‘같은 교회’를 다닌 두 아이의 끔찍한 ‘죽고 죽이는 모습’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바로 ‘같은 교회’를 다니면서 날마다 서로 험담하고 무시하고, 뒷말하고 조롱하며, 따돌림을 하고 누군가를 숭배하고, 몰려다니고 끼리끼리 숨어 다니고, 자랑하고 비난하며, 시기하고 비교하고, 거짓웃음 짓고 거짓눈물 흘리며…, 서로를 말로 죽인다. 눈빛으로 죽이고 죽는다. 때로는 외적 차림새로 죽이고 죽는다. 더 기가 찬 것은 말씀으로 서로를 끝없이 죽이고 죽고, 다시 살아나서 또 죽고 죽인다.
나는 두 아이의 비극적인 상황, ‘같은 교회’의 어린이 성도로서 벌어진 처참한 현장 앞에서 회개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도 교회에서는 눈에 보이는 시뻘건 피를 흘리지 않을 뿐, 쉼 없이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진다.
주님은 ‘살인’을 말씀하시면서 형제 사랑을 이어 전해주신다. 그런데 그 형제 사랑은 예배나 예물보다 앞서는, 더 중요한 것임을 알려주신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럴듯하게 보이는 양들과 소들을 자랑하듯 끌고, 제단 앞에 가서 빨리 제사를 드리려고 정신없이 달려간다. 그리고 ‘나의 제사’를 그럴듯하게 눈물콧물 흘리며 거창하게 드린다. 방언을 하고, 두 손을 들고, 가슴을 치고, 주위 사람들에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축복까지 해준다.
그러나 자신 때문에 많은 이들이 아픔이나 고통을 넘어서서 ‘나도 죽고 상대방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몸부림을 치고 있는지 따위는 알지도 못하고, 안다 해도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다. 이런 생생한 현장을 보며 어린 영혼들조차 꺼져가는 심지처럼 빛을 잃어간다. 우리가 정말 구원받은 자라면 그 소녀에게 함부로 돌을 던지지 말자. 대신 내가 그동안 죽인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헤아리고, 회개하고 새해를 맞아들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