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주일, 중등부 예배를 마치고 난 뒤, 2학년 아이들과 함께 담당교사 중 한 분이 개업한 샤브샤브 뷔페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마치 점령군처럼 음식을 휩쓸었지요. 얼마나 열심히 점심시간을 즐겼을까요. 나중엔 식당 안에 우리만 남아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몇몇 짝을지어 부른 배를 가라앉히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나는 선생님들과 자리를 했지요. 그런데 갑자기 한 쪽 자리에서 커다란 울음소리가 터졌습니다.
그 자리로 가보니 지우(가명)가 식탁에 엎드려 울고 있고, 나머지 세 명의 여자 아이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행복하고 풍성했던 만찬이 불안하고 싸늘한 상황으로 바뀐 것이지요. 교사들은 서둘러 아이들과 기도를 한 뒤, 해산시킨 다음 지우와 세 친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지우가 A에게 자기 집안문제를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라며 고백했는데, 학교 뿐 아니라 교회 아이들까지 다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 지우야, 부모님 애기라서 많이 화났구나?
지우: 화나는 것보다는요, 쪽 팔려요. 날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나는 지우에게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해주면서 조언을 해주고 싶었지만 참았지요. 겨우 16살 소녀에게 ‘나는 죽었습니다’라는 말을 하며 설득한다는 게 부담스러웠거든요. 다행히 다른 선생님들의 사랑과 지혜 넘치는 위로로 지우는 눈물을 멈추었고, ‘날 이렇게 우습게 볼 줄은 몰랐어요!’라며 수차례 말했습니다.
그날 나는 집에 오던 길에 한 가지 깨달았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날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이라는 분노와 모멸감에 가득 찬 말을 자주 한다는 것이지요. 한 마디의 말, 어떤 한 가지 행동이나 분위기 등 이런 것에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고 느끼면 사람들은 처음에는 어색함에 젖어들다가 그 다음에는 수치심에 괴로워 합니다. 그것은 분노와 모멸감으로 확대되다가 마지막에는 관계를 끊거나 스스로 골방 안으로 숨어버리지요.
‘날 얼마나 우습게 생각하면’, ‘나를 얼마나 하찮게 봤으면.’ 한번 이 생각에 빠지면 열에 아홉은 헤어나지 못합니다. 늪에 빠진 것처럼 자신을 추스르려고 발버둥칠수록 점점 더 깊이 늪 속으로 들어가는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나 역시 이런 적이 수없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우의 생각으로 꽉 찬 어느 날, 성경을 묵상하다가 한 부분에 딱 멈추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죽이려고 무리들 앞에 대제사장 가야바와 함께 있던 장면이었지요(마태복음 26장 67~68절). 그들이 예수님께 저들 멋대로 ‘사형’을 선언하면서부터 시작되는 사건입니다. 나는 성경말씀처럼 그대로 해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에 침 뱉으며.’ 나는 내 얼굴이 눈앞에 있는 듯 침을 뱉었습니다. 순간 저절로 내 얼굴이 옆으로 휙 돌려졌습니다. 허공에 있는 얼굴에 침을 뱉았는데도 말입니다. 그만큼 수치스러움이 컸지요.
그 다음에는 ‘주먹으로 치고’. 나는 오른손 주먹으로 나의 온 몸, 특히 가슴과 배 부분을 쳤습니다. 아팠고, 역시 모멸감이 들었습니다. 내가 나를 쳤을 뿐인데.
세 번째로는 ‘손바닥으로 때리며’. 손바닥으로 어디를 때리겠습니까? 바로 양쪽 얼굴이지요. 나는 두 손을 다 사용해서 세차게 나의 양 볼을 후려쳤습니다.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야! 너를 누가 때렸는지 선지자처럼 맞춰 봐라!’는 식으로 조롱을 했습니다. 나는 스스로 그 무리가 되어 조롱하듯 나에게 말했지요. ‘노경실아! 네가 작가라며? 대박 작품이나 있어?’
자, 여러분이 예수님이었다면 이 모든 과정을 겪으면서 자존감을 생각할 여유가 생길까요? 나를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하고 분노할 여력이 있을까요? 이제는 아무리 힘들어도 ‘날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이란 생각 대신에 일초도 머뭇거리지 않고 재빠르게 아무 죄없이 우리를 위해 모욕과 능욕을 당하신 예수님을 생각하세요. 그러면 우리의 분노나 섭섭함은 어찌나 작은 것인지 하루에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이 능히 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할 것입니다.
한편, 나는 주위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과 진심의 마음으로 보아오고 있는가?’라는 돌아봄의 기회도 자주 갖게 될 것 입니다.
빵 기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