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뚜기의 환상을 본 아모스가 “주 여호와여 청하건대 사하소서 야곱이 미약하니 어떻게 서리이까”라고 간구하자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셨습니다(7:2~3). 바다와 육지를 삼키는 큰 불의 환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지자가 간구하고 하나님이 뜻을 거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셋째 환상은 다릅니다. 다림줄을 손에 들고 담 곁에 서신 주님이 결연히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이삭의 산당들이 황폐되며 이스라엘의 성소들이 파괴될 것이라 내가 일어나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 하시니라(7:8).”
다림줄은 기준입니다. 담과 벽을 쌓을 때 수직선을 맞추는 도구인 다림줄이 없으면 건물은 머지않아 금이 가고 기울다 무너지게 됩니다. 그래서 다림줄은 사회의 도덕적, 영적 기준을 상징합니다. 차들이 저마다 가고 싶을 때 가고 선다면 혼동과 사고를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시시때때로 불편하게 느끼더라도 교통신호를 지켜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 기준을 들이댄다면 사회는 망조가 듭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혼돈기인 사사기를 한마디로 정리하는 묘사가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인 것이 우연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영원히 여호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왕이 없는 사회, 즉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나라, 모두가 제 눈에 옳은 대로 하는 사회의 모습이 어떠한지는 사사기 말년의 대혼돈과 내란을 보면 쉬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모스 앞에 버티고 서신 하나님께서는 다림줄만큼은 거두실 생각이 없으십니다. 그러니 그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아모스 역시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을 양보할 리 없습니다. 아모스가 이스라엘 왕과 지도자들의 배교행위를 신랄하게 비판하자 정치적 제사장 아마샤가 아모스를 고발하고 나섰습니다. “때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에게 보내어 이르되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아모스가 말하기를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겠다 하나이다(7:10~11).” 좋은 약은 입에 쓰고, 옳은 말은 귀에 거슬립니다. 게다가 북 이스라엘도 아닌 남 유다 출신 ‘외지인’의 입에서 나오는 직언은 여로보암과 그들 둘러싼 권력층의 귀에 몹시도 거슬렸을 것입니다.
아마샤가 아모스에게 경고를 날립니다. 어쩌면 같은 종교인으로서 왕의 분노를 감지한 아마샤가 베푼 나름의 충고였을지도 모릅니다.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에서나 예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임이니라(7:12~13).” 직업적 텃세치고는 거칠기 그지없는 신성모독성 발언입니다. ‘유다에서나’라니요. 그곳에 참 성전이 있고,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가 그곳에 있는데 감히 ‘유다 땅 거기에서나’라니요. 북이스라엘의 원죄였던 임의로 세운 성소를 들이대면서 거기가 ‘왕의 성소,’ ‘나라의 궁궐’이라 거드름을 피워대니 아모스가 받아칩니다.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라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서 양 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7:14~15).” 나는 너같은 직업종교인이 아니다, 나는 너희를 향해 하나님의 음성을 전하라는 부르심을 직접 받은 사람이다… 소명이 분명할 때 확신과 용기가 따릅니다. 아모스의 소명의식과 확신은 그의 강하고 도전적인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동시에, 현대사회에서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가져야 할 담대함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모두 주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던가요?
백석대·구약신학
유선명 교수의 예언서 해설 (150) -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예언하라 하셨나니” (암 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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