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이신 하나님
로마서 8:14~15
찬송: 380장
세계에서 여러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에 대해 설문 조사한 결과 1위는 어머니였습니다. 반면에 아버지는 70위 안에도 못 들어갔습니다. 일반적으로 아버지에 대해 떠올리는 이미지는 보통 엄하고 무서운 분으로 떠올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설명해 주십니다. 예수님도 주기도문에서 제일 먼저 하나님을 부를 때 아버지로 부를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아버지 의미를 좀 더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첫째 아버지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성경은 여자가 아이를 낳았다 하지 않고 남자가 아이를 낳았다고 표현합니다. 나를 만들어 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어머니를 떠올리지만 성경은 사랑과 긍휼히 많은 아버지로 하나님을 가르쳐 줍니다. 세 번째는 공급자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가정의 필요를 공급하는 존재이듯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필요를 요구할 자격을 얻게 된 자녀의 권세를 가집니다. 네 번째 보호자입니다. 인생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주의 지팡이로 건져주시고 주의 막대기로 우리를 보호하사 우리를 안위(위로)해 주십니다.
오늘도 나에게 이런 하나님 아버지가 있음을 믿고 승리하시는 하루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의 기도
나를 있게 하시고 나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산파들
출애굽기 1:15~21
찬송: 64장
이집트 왕은 아주 험악한 인구정책을 시행합니다. 태어나는 모든 이스라엘 남자아이는 죽이고, 여자아이는 살리는 정책입니다. 이것을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에게 실행하도록 명령합니다. 그런데 히브리 산파들은 이집트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라고, 기록합니다.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는 고대 근동의 최고 권력자 이집트 왕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이집트 왕의 명령을 거부합니다.
우리는 세상살이를 하면서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자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두려워하면 세상이 우리에게 원하는 방법을 따라 삽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방법을 따라 삽니다.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20절),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21절) 하나님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외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 2:30)
십브라와 부아처럼 세상의 권력보다 하나님을 두려워 할 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십니다. 오늘 하루도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인생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의 기도
세상이나 세상의 권력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인생 되게 하옵소서.
원수 갚음 대신 원수 사랑
사무엘상 11:1~15
찬송: 218장
오늘 본문은 ‘널 미워 해치는 원수라도 언제나 너그럽게 사랑하라’ 찬송가 218장 2절 가사가 생각나게 하는 말씀입니다. 사울은 은밀한 중에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았고, 공식 석상에서 제비뽑기를 통해 왕으로 결정되었으며, 모든 백성은 만세를 외치며 기뻐했지만, 백성들 가운데 일부는 사울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암몬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옵니다. 이것은 국가적 위기였지만, 사울은 이 싸움을 승리로 이끌며, 이제 이름과 허울뿐이 아닌 진정한 이스라엘 왕으로 인정받습니다. 전화위복이 된 셈이지요.
그런데 외부의 적을 제거하고 나니, 사울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업신여기던 자들을 끌어내 죽이겠다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12절). 이때 사울은 위대한 선언을 합니다. “이 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리니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음이니라”
인간적으로만 말하면 사람들이 흥분하여 그런 말을 할 때 속으로 기뻐하며 미소 지을 줄 알았던 사울 아닙니까? 그런데 사울은 자신을 반대하던 자들에게 지금 관용을 베풀고 있습니다. 이 모든 승리가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변하여 새 사람’ 되게 하신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도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향해 이와 같은 마음 갖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우리는 서로 화목을 추구하게 하옵소서.
강건케 되는 은혜
디모데후서 2:1~7
찬송: 303장
복음의 위임을 받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충성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영혼을 살리는 복음은 아무에게나 위임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의 위임을 받는 제자 디모데에게 은혜 안에서 강함을 요구했고, 위임을 받은 디모데는 다시 바울에게서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였고, 그들은 다시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 왔습니다.
복음은 위탁을 받을 강하고 충성된 사람을 요구합니다. 복음을 위탁받고 사용하며 나누고 전할 우리가 불충하면 그 복음은 대가 끊깁니다. 주위에 믿고 구원받아야 할 전도 대상자가 있지만 나의 복음이 그에게 잘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면 강해져야 합니다. 강해지면 또한 충성된 사람이 됩니다. 우리 교회가 은혜 받고 강해지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충만히 위임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열방으로 충만히 선교할 교회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군사란 어떤 전쟁 상태를 전제합니다. 완전 평화 상태라면 군대가 필요 없습니다. 이 땅은 사실 치열하고 가공할 영적 전쟁 상태입니다. 전시(戰時)의 군사는 훈련이나 전투에서 고난을 피할 수 없는데 강한 자만이 그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강하므로 고난 중에 훈련을 수행합니다. 군인이 만약 약하면 아무 일에도 사용되지 못할 것입니다. 주의 고난에 열외자가 아니라 강하여 고난 받을 수 있는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기도
모두가 강한 군사로서 영적인 경기에서 승리하게 하옵소서.
믿음으로 사는 삶
히브리서 11:1~3
찬송: 413장
믿음으로 살면 만사형통한가? 결론만 본다면 맞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과정을 보면 분명 만사형통이 아니라 만사불통이 더 합당합니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가나안 땅에서 겪는 고달픔과 힘겨움을 겪었고,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기 전 종으로 팔려 가 고난을 받았으며, 다니엘도 바벨론의 총리가 되기 전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고난들을 보면 믿음으로 사는 삶은 오히려 만사불통에 더 가깝습니다. 그만큼 고난과 어려움을 지나서야 ‘만사형통’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에 과정을 무시한 채 획기적인 기적을 바라는 건강하지 못한 신앙들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한탕주의 신앙이 왜곡된 형태로 나타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은 결론적으로는 매우 환상적일 수 있지만, 과정을 보면 처절하게 큰 아픔을 잘 이겨내야 하는 고통을 감당해 내야 하는 과정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 만사불통의 삶을 견뎌냈습니다. 만사형통에 이르게 된 것에 대하여 16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 땅의 삶에 집착하여 만사형통이 소망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을 소망하며 만사불통까지도 믿음으로 이기고 승리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길 축복합니다.
•오늘의 기도
믿음으로 살면서 겪는 고통, 아픔, 힘겨운 것들을 잘 감당하게 하소서.
“사랑합니다”
요한복음 2:13~17, 열왕기상 9:3
찬송: 293장
산에 올라가 보면 풀들도 이름 모를 꽃들도 얼마나 생명을 자랑하는지 모릅니다. ‘나도 저 꽃처럼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가?’, ‘내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고 있는가?’를 돌아볼 수 있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가 성전 안에서 양과 소를 파는 사람들을 보고 그 상을 엎으시며 화를 내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분은 성전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이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 입니다.(합 2:20)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내 아버지의 집인 성전을 너희들이 더럽게 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거룩하게 구별하신 곳’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룩히 구별한 이곳에서 우리는 구별된 거룩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두었고,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 그 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우리 가정의 삶이 힘들고, 지치고, 두렵고, 떨릴 때 가야하는 곳은 성전입니다. 그곳에서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예수님은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주십니다. 이 성전은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전을 사랑해야 합니다. ‘모두의 마음이 성전을 사랑합니다’로 고백되길 축복합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 모두는 주를 사랑하는 마음같이 주님의 몸된 교회 성전을 사랑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