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은혜를 묵상하면서 내 마음에 사순이라는 말이 다르게 해석이 되었다. 원래 사순(四旬-넉사, 열흘 순)이란 40일을 의미하면서 부활주일 전 40일의 기간을 말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것이 사순(死旬-죽을 사)으로 생각이 되었다. 40일 동안 죽으면 거의 죽겠구나…. 그런데 나는 죽지 않고 있다. 예수님의 죽음만 생각하고 있고 내가 죽어야 함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 그러기에 살려고만 한다. 그러니까 실패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예수를 믿는 사람은 곧 모든 것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다. 이 말의 의미는 능동적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을 말한다. 곧 자기죽음이다. 육체에는 죄성이 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다. 항상 죄에 쏠려서 사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육체를 죽여야 내 산다. 이것은 계속 우리 속에서 올라온다. 그럴 때 마다 ‘나는 그리스도로 사는 사람이야 나는 이미 죽었어….’ 이런 믿음으로 그 마음과 감정의 유혹을 죽이는 것이다. 본래의 죄성이 올라오면 바로 예수님의 보혈로 그것을 덮어야 한다. 이것이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다. 나의 속에서 무엇이 올라오고 있나? 그것을 죽이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1)
나는 왜 이렇게 안 바뀔까? 죽지 않아서 그런다. 예수님 때문에 달라진 내 모습이 무엇일까? 나의 정제 되지 않은 언어, 거친 말투, 험한 표정, 분노의 성질, 함부로 하는 태도, 자기중심적인 교만, 손해 보지 않으려는 이기적인 모습 등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에게 있다. 신앙에도 그렇다. 형식적인 예배와 기도, 억지로 하는 헌신, 구원이나 은혜 받음의 감격도 없어지고, 진리도 없어지고 지식만 남고, 겉모습만 그럴듯하고, 목사, 장로, 집사, 교사, 성가대원 등의 직분을 가지고 있다고, 모태신앙이고 은사체험이 있다고, 문제가 있는데도 자기는 잘 하고 있다는 착각에 변하지 않고 있는 바리새인의 모습이 나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안 하고 자기 자랑에 취해 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일 수는 있어도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 즉 진짜가 아닐 수도 있다.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진짜다.
무디(D. L. Moody)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다음에 이런 말을 했다. “전에는 내 소원이 축복이더니 지금은 주님 자신이고, 전에는 내가 감정의 중심이더니 지금은 말씀이 나의 중심이고, 전에는 내가 쉬지 않고 달라고만 하더니 지금은 쉬지 않고 찬송하며, 전에는 내가 주님을 사용하려 하였더니 지금은 그가 나를 사용하심을 내가 원하게 되었다.”
이런 달라짐이 많을수록 진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잘 안 바뀐다. 그러기에 죽어야 한다. 내 믿음에 자꾸 문제가 되는 이유가 어쩌면 내가 더 죽지 않아서 그럴 수 있다. 환경이나 상황의 문제가 아닌 내가 살아 있기에 안 되는 것이다. 남을 살리고 내가 죽는 것이 십자가의 신앙임을 믿고 이제 그 죽음을 만들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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