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태동 전 기독교 활동의 중심지였던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이슬람 학교에서 반외세 지하드 세력으로 성장
지난 8월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를 선언하며 극단주의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이 정권을 장악했다. 아프간에 남겨진 기독교인의 운명과 선교 상황은 어떻게 달라질까. 본지는 중동 정세 전문가로 활약해 온 서동찬 교수의 특별기고를 연재한다.
아프가니스탄의 기독교
아프가니스탄은 이슬람이 태동하기 이전에 기독교 활동의 중심지였다. 페르시아 지역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피해 아프가니스탄에서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했다. 한때 페르시아 지역은 로마 제국의 교회 박해 당시 교회의 피난처가 되기도 했지만, 4세기 콘스탄티누스 로마 황제가 기독교로 전향하자 페르시아 제국은 교회를 적으로 여기고 15만 명 이상의 기독교인들을 학살했다. 페르시아의 박해를 피해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온 기독교인들은 중앙아시아를 넘어 중국과 티베트 그리고 몽골 지역으로 선교 사역을 확장했다. 그래서 징기스칸의 몽골 제국 안에도 수많은 네스토리우스 계열 기독교도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몽골 제국이 사라지고 이슬람이 북인도를 장악하면서 이 지역의 기독교인들은 무슬림들의 박해, 끊이지 않는 전쟁, 교역의 중단 등으로 그들이 감내할 수 있는 정도를 훨씬 넘는 시련을 당했다. 그리고 2021년 8월 미군이 철수하면서 8천에서 1만 명에 달하는 아프가니스탄의 기독교인들은 또다시 탈레반의 통치하에 남겨지게 됐다.
반외세 지하드 세력의 성장
그렇다면 탈레반은 누구인가? 다리어로 탈리브는 ‘학생’을 의미하는데, 마드라사(이슬람 학교)에서 가난과 전쟁의 고통 속에 성장한 세력이라 할 수 있다. 소련과 미국이 대치하는 첨예한 갈등의 분계선이었던 아프가니스탄은 1979년 12월 25일, 소련의 침략을 받는다. 아프가니스탄에 들어선 친소련 정부가 과도한 사회주의 실험을 감행하다가 국민들의 저항으로 좌초하자 소련이 군대를 투입시킨 것이다.
그러자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는 소련군에 저항하는 이슬람 지하드 전사들을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국경 지역으로 동원한다. 오사마 빈라덴도 사우디아라비아의 제다 대학생 시절에 교수였던 압둘 아잠의 제안으로 1985년 아프가니탄으로 들어왔다. 미국은 소련을 몰아내기 위해 막대한 규모의 전투 장비와 무기를 공급했고, 사우디아라비아는 자금을 댔다. 이러한 와중에 수많은 아프간 난민들이 파키스탄으로 몰려들었고, 아이들은 이슬람 학교가 제공하는 기숙사에서 숙식을 제공받으며 성장했다. 이 학생들이 나중에 탈레반 세력으로 급부상했으며, 이들은 평상시에는 쿠란을 암송하는 단순한 교육을 받다가 여름과 겨울 방학 때는 아프가니스탄에 직접 투입되어 지하드 전투를 수행하며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1989년 소련은 막대한 군비와 병력 손실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고, 1991년 12월 소련은 붕괴하고 만다. 비록 소련이 떠났지만 아프가니스탄에 평화는 오지 않았다. 소련에 저항하던 무장 조직을 무자헤딘이라고 부르는데, 문제는 이들이 소련군의 퇴각 이후 통일된 정부 수립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무자헤딘들이 각 지역을 거점으로 독자적인 군사 행정 조직을 유지하고 갈등하는 틈에 아프가니스탄은 중앙 정부가 유명무실해지며 내전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만다.
1994년 봄, 아프가니스탄의 남부 도시 칸다하르에서 10대 소녀 두 명이 지역 군벌에 납치되어 머리를 삭발당하고 강간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주민들은 마드라사에서 선생으로 있던 무함마드 오마르에게 도움을 청했고, 오마르는 마드라사 학생 30명을 모아 악행을 저지른 군벌을 처단한 후 사체를 탱크 포신 끝에 매달아 본보기로 삼았다. 수개월 후에는 칸다하르 군벌 두 명이 한 소년을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면서 분규가 커지자 오마르와 그의 학생들이 나서서 소년을 구출한다. 이들이 바로 탈레반이며 그 중심에는 마드라사 교사 오마르가 있다.
탈레반이 성장했던 이슬람 난민 학교는 이슬람 중에서 가장 근본주의적 성향을 띄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합주의가 지배적인 환경을 형성했다. 원래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은 하나피 학파에 속한다. 하나피 학파는 9세기에 발전한 4개의 이슬람 법학파 중에서 가장 자유주의적이고 위계 의식이 없으며 분권적이다. 그러던 아프가니스탄이 지난 40년의 전쟁을 겪으면서 가장 관용적이지 않은, 가장 극단적인 탈레반의 수중에 떨어진 것이다.
와합주의는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를 탄생시킨 이슬람 정화 운동이다. 성인 숭배와 각종 무속적 색채의 이슬람 신앙에 물들어있던 아라비아반도의 사람들에게 쿠란과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 시기로 돌아가자고 부르짖은 와합의 외침은 큰 반향을 몰고 왔다. 당시 아라비아반도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영국 군대가 진출하고 있었다. 와합은 이러한 외세의 침탈이 타락한 무슬림 신앙에 있다고 보고, 이슬람의 정화만이 알라의 진노를 면하고 외세를 몰아낼 수 있다고 외쳤다. 탈레반은 와합주의 교육을 받으면서 반외세 지하드 세력으로 성장한 것이다.
탈레반과 알카에다
그런데 어떻게 이슬람 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된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할 수 있었을까? 1996년 탈레반이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북부 지역(타지크인, 우즈베크인 거주)을 제외한 광대한 영토를 접수하게 된 것은 그 배후에 파키스탄과 미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파키스탄은 탈레반이 장악한 도시 칸다하르를 통해 중앙아시아로의 물류 수송로를 확보하려고 했는데, 지방 군벌들의 내전 때문에 안전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미국 또한 중앙아시아의 가스를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통하는 파이프라인을 통해 확보하고자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정치 군사적으로 강력한 중앙 정부가 필요했다. 이때 마침 순수한 학생들이 탈레반으로 뭉쳐서 아프가니스탄의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군사적인 성공을 거두는 것을 본 파키스탄과 미국이 배후에서 탈레반을 지원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1996년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하기 전에 이미 오사마 빈라덴과 알카에다가 먼저 들어와 있었다. 오사마 빈라덴은 소련이 물러난 후 모국인 사우디아라비아로 복귀했으나 그를 부담스러워했던 사우디 왕가가 그가 아프가니스탄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한편 1991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미군은 사우디아라비아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이라크 군대를 몰아낸다. 오사마 빈라덴은 이슬람의 성지인 아라비아에 외국 군대 주둔을 허용한 사우디 왕가를 신랄하게 비판함과 동시에 미국에 대한 지하드를 준비한다. 소련을 몰아낸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에는 미국이라는 적을 상대로 한 글로벌 이슬람 혁명을 생각한 것이다.
빈라덴은 이슬람 투자가 절실하던 수단으로 알카에다 본부를 이전하였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아 1994년 결국 아프가니스탄의 칸다하르로 들어왔다. 그때는 이미 탈레반의 오마르가 칸다하르를 접수하고 카불로 진군할 때였다. 막대한 자금과 전투 능력을 기대한 오마르는 아프가니스탄을 전 세계 글로벌 지하드를 추진하는 알카에다의 근거지로 내어준다. 그리고 2001년 9월 11일, 오사마 빈라덴의 지령을 받은 독일 함부르크 알카에다 조직원 4명이 미국 본토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을 타격했다.
테러와의 전쟁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즉각 알카에다의 근거지인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보복 전쟁을 시작했다. 육상 기지에서 발진한 15대의 폭격기와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25대의 전투기가 힌두쿠시산맥 상공을 날아갔고, 아라비아에 있던 미국과 영국 함정들에서 50발의 토마호크 미사일이 발사되었다. 수도 카불은 미군의 공중 공격이 시작된 지 두 달 만에 함락되었고 탈레반은 급속도로 붕괴했다.
아프가니스탄의 국민들은 탈레반의 광신적인 행위에 지쳐 있었고, 파키스탄의 지원 중단은 탈레반 몰락의 주요 원인이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정상적인 국가를 재건하기도 전에 이라크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부시 대통령은 탈레반이 카불에서 축출되기도 전인 2001년 추수감사절 주 초에 이라크 침공을 위한 임시 계획을 수립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오마르와 빈라덴이 산악 지대에서 재건을 모색하고 있는 와중인 2003년 3월, 미국은 서둘러 이라크를 침공한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핵무기를 포함한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고, 알카에다와 한 패이며, 우방인 이스라엘을 공격한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나중에 드러난 것처럼 애초에 미국은 사담 후세인에게 핵무기나 기타 대량살상무기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명분으로 이라크를 침공했다. 석유가 나지 않는 아프가니스탄과 달리, 이라크에는 중동 석유의 막대한 양이 매장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병력의 주력을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라크로 이동시키고 4천 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국제안보지원부대를 투입, 8천 명의 전투부대를 유지시켰다.
카불의 임시 정부는 힘이 약했고, 미군은 지방 군벌들을 정리하는 대신 오히려 그들을 도와 지역 치안을 도모했기 때문에 탈레반 이후 아프가니스탄 재건은 거의 불가능했다. 아프가니스탄은 40년의 전쟁을 거치면서 가장 가난하고 기본적인 생존마저 보호받지 못하는 나라로 전락했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마약 재배지가 되고 말았다. 여기에 또다시 탈레반이 카불을 장악해 수많은 난민들이 생존을 위해 탈출을 감행하고 있으며, 남겨진 아프가니스탄의 현지 기독교인들은 박해와 시련의 혹독한 시간을 맞고 있다. 세계교회가 아프가니스탄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개입하셔서 남겨진 교회를 지키시고, 도우시고, 다시 일으키실 것을 간구한다.
서동찬 교수/한반도국제대학원대학교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Kazan State University 국제정치학 Ph.D
백석대학교신학대학원 M.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