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를 시작할 때 이주 노동자 사역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1994년 인천 만수동에 지하 20평을 얻어 개척하고는 6개월 동안 한 명의 교인도 등록하지 않을 때는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까지 고민했다. 오기가 생겨 거리에서 스피커를 켜고 혼자 찬양하고 설교했다. 그리고 교인들이 등록하기 시작했다. 곧 40평으로 옮기고 단독 건축까지 준비할 정도로 부흥했다.
그런데 인천 만수동 사랑마을교회의 김철수 목사는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면서 사역의 길이 바뀌었다. 그 이후 20년 넘게 이주 노동자들과 동고동락 하고 있다.
“사람 대접하는 것이 복음”
“시흥으로 넘어가는 좁은 2차선 도로인데, 한 사람이 다리를 쭉 뻗고 앉아있어요. 큰일 나겠다 싶어 차를 세우고 다가가니까 막 도망을 가요. 인근 공장에서 일하는 필리핀 노동자였지요. 단기선교를 갔다 배운 따갈로그어로 말을 걸어 안심시키고 물어보니 너무 힘들어서 자살하러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자살을 막으려고 온 두 친구를 데리고 사는 곳을 찾아가봤어요.”
곧 무너질 것 같은 재개발 지역이었다. 엉망이 아닌 것이 없었다. 한국인 목사가 찾아왔다는 소식에 온 동네 사람들이 찾아왔다. 이후에도 방문은 계속됐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목사에게 도움 요청이 쏟아졌다. 거절할 수 없었다. 자신 역시 미국 유학 중 겪었던 수많은 차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교회 지을 땅 보러 다니다 말고 계속 그 사람들을 만났어요. 우리도 당신들 교회에 갈 수 있냐고 하니까 당연하다고 했죠. 처음에는 8명, 곧 30명 넘게 오니까 그렇지 않아도 비좁은 예배당이 더욱 비좁아 한국 교인들은 싫어했습니다. 같이 앉기를 부담스러워하고, 별도로 예배를 드리자는 제안도 있었습니다.”
김 목사는 한국인 교인들을 설득했다. 공장에서 일주일 내내 차별받다가 교회에 한번 와서 사람 대접을 받게 하는 것이 복음 아니냐고 이야기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예배하면서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한 안디옥교회를 우리가 만들 수 있다고도 강조했다. 결국 김 목사는 선택해야 한다면,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때가 1995년 일이다.
교인 위해 아르바이트 하는 목회자
지금 사랑마을교회는 인천 남동구청 인근의 시장 상가건물 300평을 사용하고 있다. 출석하고 있는 교인들은 대부분 필리핀 출신들이고, 제적 교인은 400여명 정도이다. 아마 한국에서 필리핀인들이 가장 많이 출석하는 교회일 것이다.
“10명 중 6명은 야간근무를 합니다. 수당도 많고 한국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일하기 편하거든요. 미등록 노동자라면 단속을 피할 수도 있어요. 교회는 돌아가면서 오는 거죠.”
외국인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삶 속에서 좋은 일도 가슴 아픈 일도 무수히 겪었다. 돌이켜보면 별별일 많았다. 교회에 출석하는 한 부부는 모든 직원이 사장 몰래 놀고 있을 때에도 성실하게 일했다. 남이 알아주든 말든 열심히 일하는 부부를 결국 사장이 알게 돼 신임해 주었고, 추방됐을 때는 다섯 번이나 필리핀을 방문해 데려오려고까지 했다. 사장은 부부를 위해 현지에 작은 공장을 차려주었다. 불교 신자인 사장은 예수믿는 사람을 다시 보고, 이후 사랑마을교회에 매번 후원물품을 보내오고 있다.
김 목사가 제일 힘들 때는 우리나라에서 목숨을 잃은 교인들을 모국으로 보낼 때이다. 천국에 간 교인들이 생각나 한동안 말을 잊지 못하고 눈시울을 적시는 김 목사이다.
“처음에는 시신을 보내느라고 빚도 많이 졌습니다. 병원이나 이런 데서 구상권을 청구해 오기도 하고요. 먼 나라는 특수관과 냉동시설, 항공료를 포함해 천만원 넘게 들기도 합니다. 그 비용을 감당하려고 통역도 하고 대리운전도 많이 했습니다.”
그랬다. 교인이 4백명이라지만 슬쩍 본 주보에 적힌 십일조 명단은 10명이 채 되지 않았다. 그는 지금도 외국인 노동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경찰에서 요청해오는 경우 통역 일을 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상황을 이해하고, 낮밤을 가리지 않고 오는 김 목사를 경찰도 선호한다. 공인 합기도 5단으로 운동신경이 뛰어난 그는 대리운전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보다 수익이 많았다고 자랑했다.
보통 콜을 받기 위해 500미터를 설정하면, 자신은 1500미터를 설정했다는 것. 야심한 밤 콜 하나를 더 받기 위해 땀흘려가며 밤거리를 뛰어다녔을 김 목사의 모습에 뭉클함이 느껴진다.
그가 또 잊지 못하는 이가 있다. 필리핀에 남편과 두 자녀를 두고 한국에 온 24살 여성이었다. 종합병원에서 살릴 가망이 없어 퇴거조치를 하겠다며 와 달라고 해서 만난 그녀는 급성백혈병이었다. 김 목사가 뛰어다니며 살려냈지만,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야 한다며 무리하다 세 번째 재발 끝에 숨지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4백만원을 모아 장난감과 항공권을 샀지만 결국 시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저는 우리 교인들에게 늘 이야기합니다. 당신들이 갈 때는 금의환향은 아니더라도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건강하게 가라고요. 꼭 돈을 벌어서 돌아가 다시는 이주 노동을 하지 말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잡은 손 놓지 말아야 한다
백석대에서 신학공부를 한 김철수 목사는 보수 교단에 소속돼 있지만, 외국인 노동자를 돕는다는 이유만으로 이념몰이를 당하기도 했다. 그 만큼 외국인 이주자에 대한 무지와 편견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적 인식에 대해 김 목사는 안타까워했다. 취업 불이익을 이야기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손사레를 친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필요해서 제도를 갖추지도 못한 채 우리는 그들을 불렀습니다. IMF 때 문 닫힌 공장을 지킨 것도 그들이었어요. 2003년 토기몰이식 단속으로 도망 다닐 때 70평 우리 교회에서 67명이 3개월을 살았습니다. 밤마다 공장장들은 교회에 와서 그들을 태우고 갔습니다. 그들은 숙련공들이니까요. 외국인 노동자들이 일하는 곳에는 한국인들이 오지 않습니다.”
마치 표적을 삼듯 이주 노동자들을 혐오하는 그릇된 사회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가장 나설 수 있는 곳이 교회라고 김철수 목사는 힘주어 말했다.
한때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사역에 교회들이 너도나도 뛰어든 적도 있다. 하지만 불법체류 딱지가 붙는 순간 많이들 사역에서 손을 뗐다. 인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채 복음에 대한 열정만으로 뛰어들었다가 잡았던 손을 놓고 만 것이다.
김 목사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스스로 서 있을 수 있도록 교회가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외국인만 따로 예배를 드리기보다 함께 하고, 효율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건강한 다문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작은 공동체 사역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랑마을교회는 그런 차원에서 6월부터 11월까지 농구대회를 10년 넘도록 개최하고 있다. 외로움 때문에 월급을 술과 마약, 성매매에 써버리는 폐해를 스스로 극복하도록 여가문화를 만들어준 것이다. 지금은 필리핀 사람들이 대회를 주도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실력도 엄청나다. 전국대회 우승까지 한 인천지방경찰청 팀을 두 배 차로 이긴 적도 있다. 지난 6월 17일 농구대회가 개막하면서 축제의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