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를 독립운동가로 길러낸 미션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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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를 독립운동가로 길러낸 미션스쿨
  • 김태현 기자
  • 승인 2024.06.25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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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 유산을 찾아서 (14) // 복음과 신학문 전수한 ‘언더우드 학당’(하)
경신학교의 전신이었던 '예수교중학교'
경신학교의 전신이었던 '예수교중학교'

언더우드는 사회에 이바지하는 실력 있는 ‘기독청년’의 양성을 위해 교육선교를 지향했다. 고아원으로 시작한 언더우드 학당이 이름까지 바꿔가며 학교로 변모한 까닭이 이것이다. 학교가 된 언더우드 학당은 신식 교육을 도입했으며, 신식 교육을 통해 독립운동가를 길러내어 조선 사회에 큰 이바지를 했다.

교육 선교를 위해 고아원에서 학교로 발전해 가던 언더우드 학당에 부침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897년 북장로교 연례회의에서 경제적인 이유로 학당의 폐쇄가 결정된 것. 언더우드, 베어드, 에비슨 등 선교사들은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결국 폐쇄되고 만다. 조선 현지 사정을 모르는 데서 발생한 실책이었다.

다행히도 4년 후인 1901년에 제임스 게일 선교사가 ‘예수교중학교’란 이름으로 학당을 재건하게 된다. 이때 기초적인 지식만을 전수하던 것에서 나아가 중등교육기관으로서 천문학, 물리학, 화학 등 심화된 근대 과목을 도입했다.

재개교 후 학생들이 빠르게 늘어났다. 1902년 13명에 불과했던 학생은 1905년에 이르러 49명으로 증가했다. 이에 새롭게 부지를 선정해 학교 건물을 건립했으며 이름도 ‘새로운 것을 깨우친다’는 의미의 ‘경신학교’로 확정했다. 기독교 계열 중등교육기관으로서 기독교인 양성과 건강한 사회의 일원 배출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성경 및 신앙교육과 중등 과목을 가르쳤다. 또한 경신학교는 한국 최초의 수공업 교육기관인 경신수공부(儆新手工部)를 설치해 실업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이때의 경신이라는 이름은 현재까지도 경신고등학교와 경신중학교에 이어지고 있다.

기독청년을 양성해 사회에 이바지하겠다는 언더우드의 생각은 결실을 맺었다. 경신학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부주석까지 지냈던 ‘김규식’을 길러냈다. 예수교학당 시절 언더우드는 집안이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쓸려 아버지는 귀양 가고 어머니는 돌아가셔 사실상 고아가 된 김규식을 만나게 된다. 당시 김규식은 굶주림에 벽지까지 뜯어 먹었다고 한다. 예수교학당에 입학한 김규식은 숙식을 제공 받으며 기독교인이자 독립운동가로 성장했다.

1894년 민노아학당 시절에는 도산 안창호가 이곳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안창호는 “배우고 싶은 사람은 우리 학교로 오시오. 먹고 자고 공부를 거저 할 수 있소”라는 밀러 선교사의 말에 이끌려 민노아학당에서 3년간 신식문물을 공부했고 기독교인이 됐다.

언더우드가 사랑으로 빚어낸 고아원은 미션스쿨이 되었고 그 미션스쿨은 대한독립에 이바지한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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