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35~40)
수천, 수백억을 들인 예배당이 랜드마크처럼 위풍당당히 서있다. 연합예배라는 이름으로 모인 수백명의 찬양대는 유수의 합창단 부럽지 않은 웅장한 소리를 뽐낸다. 5천만의 인구 중 기독교인이 천만에 육박한다고 자랑하는 우리나라다. 그러나 우리는 냉정히 성찰해보아야 한다. 뾰족한 첨탑과 수많은 군중, 번듯한 옷들과 재물 사이에서 우리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 예수는 어디 계시는가.
예수는 그곳에 계시지 않았다. 화려한 왕궁에서 귀족들과 어울리지도, 개선 깃발을 휘날리는 군대의 선봉에 계시지도 않았다. 오히려 가난한 군중들의 일상 속 거리에, 먹을 것조차 부족했던 들녘에서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셨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 종의 형상을 자처하신 그분은 언제나 가장 환영받지 못하는 곳에 계셨다.
그분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너희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과연 이 시대 교회의 시선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향해 있는가. 어쩌면 화려함에 눈이 멀어 우리 곁에 있는 ‘작은 예수’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2023년을 시작하며 ‘작은 예수’의 손을 잡는 현장을 찾아봤다. <편집자주>
단돈 100만원, 당장 생활비가 급해 빌린 고작 100만원이 숨통을 옥죄는 목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시작은 100만원에 불과했지만 금세 눈덩이처럼 불어난 이자는 원금을 훌쩍 뛰어넘어 A씨의 목을 졸랐다.
매주 걸려오는 독촉 전화에 숨이 턱 막혔다. 이대로라면 원금의 수십배로 불어난 빚이 A씨의 삶을 온통 잠식하고 말리라는 공포가 먹에 담근 종이마냥 번져나갔다. 짙은 어둠이 깔린 밤하늘엔 별빛 한 점 보이지 않았고 이 밤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더 이상 아침을 볼 수 없다는 좌절감에 극단적인 생각마저 뇌리를 스쳤다.
특별하지 않은 불행의 굴레
영화에서나 볼 법한 특별한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다. A씨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듬직한 아들이자 의리 있는 친구였으며, 다정하고 책임감 있는 선배였다. 달리 특별한 잘못을 한 일도 없었다. 대한민국에 태어난 누구나 그렇듯 학자금 대출에 기대 학업을 마치고 취업전선에 뛰어든 평범한 ‘취준생’ 중 한 명일뿐이다. 다만 가난할 수밖에 없는 취업준비 기간을 지원해줄 돈 많은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이 그의 유일한 불행이었다.
남부끄럽지 않게 최선을 다했노라 자부했지만 사회의 벽은 높았다. 2년, 3년… 의도치 않게 취업준비 기간이 길어지자 단기 알바로 연명하는 생활도 힘에 부쳤다. 하지만 담보도, 신용도, 일정한 소득도 없는 그에게 시중은행이 돈을 믿고 맡겨줄리 없었다. 밀리고 밀려 문을 두드린 곳은 결국 불법 사금융, 이른바 사채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법정 최고금리 20%를 훌쩍 넘는 이자에 덜컥 겁이 났지만 눈앞의 배고픔이 두려움을 삼켰다. 100만원쯤이야 다달이 갚아나가면 금방 해결되리라 쉽게 생각했던 것도 사실. 그런데 그게 혼자 힘으로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지대의 시작이리란 걸 그때의 A씨는 몰랐다.
20대 청년들 사이에서 A씨와 같은 사례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청년 무이자 전환대출을 시행하는 희년은행의 김재광 센터장은 절박한 심정으로 희년은행을 찾은 청년들을 자주 만난다.
“불법 사금융은 인터넷 광고상에서는 마치 공인된 대부업인양 속여서 상품을 팔아요. 그런데 20대 청년들은 금융 관련 정보가 부족하니까 금리가 어떻게 되고 상환 조건이 어떻게 되는지를 잘 모릅니다. 만약 돈 300만원을 빌렸을 때 향후 몇 년간 총 얼마를 갚게 되는지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어요.”
사채의 경우 일정 기한을 넘기면 주 단위로 이자가 붙는다. 게다가 버겁게 이자를 갚아나가고 있는데 갑작스레 만기가 됐다며 눈덩이처럼 늘어난 금액의 일시상환을 요구한다. 사채까지 찾아야 했던 주머니 사정의 청년들이 도둑처럼 들이닥친 상환요구에 수백, 수천의 금액을 내놓을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다보니 여기저기 급전을 찾아 소위 ‘돌려막기’를 시작한다. 악몽 같은 이자에 신음하지만 잠은 깰 생각을 하질 않는다.
문제는 불어난 빚이 지갑에만 구멍을 내는 것이 아니라 일상마저 갉아먹는다는 점. 빚이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나면 그땐 혼자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가뜩이나 경제관념이 부족하고 금융 정보와 지식이 부족한데 과다 채무 상태마저 겹쳐버리면 재정을 지혜롭게 관리하는 활동 자체가 감태하게 된다. 운동을 하지 못하면 근육이 퇴화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빚이 쌓일수록 판단이 흐려지고 아예 삶을 포기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상담을 해보면 아주 기초적인 정리조차 힘들어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언제 어디에서 얼마를 빌렸고 상환을 어떤 방식으로 하고 있는지를 정리해달라고 말씀 드리는데 그게 힘든 거예요. 그래서 상담을 통해 기억을 되짚어가며 하나씩 정리를 시작하는데 그것만으로도 이분들에겐 큰 경험이죠. 자기 상황과 부채 상황을 객관화하고 현실을 자각하는 것, 이게 출발점이라고 생각해요.”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날개짓
사채를 쓴 사람은 매순간 속이 타들어간다. 영화의 한 장면 마냥 건달을 동원해 부술 듯이 문을 두드려대며 욕지거리를 퍼붓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매주 걸려오는 독촉전화와 늘어나는 이자에 청년들은 이미 추심의 압박감에 짓눌린다. 강압적으로 추심을 하지 않음에도 빚을 갚지 않으면 어떤 해코지를 당할 수 있다는 공포에 시달리는 것이다.
“상담을 요청하신 어떤 분이 본인은 100만원을 빌렸을 뿐인데 몇 달이 안 지나서 200만원으로 불어났대요. 그런데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삽시간에 빚이 불어나는 걸 보며 이 빚을 갚지 못하면 앞으로 얼마나 무섭게 커질까 싶더라는 거죠. 그걸 생각하니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대요.”
사람들은 의아해한다. 고작 100만원, 200만원이 뭐라고 삶을 포기하느냐고. 그러나 그들은 모른다. 이 젊은이를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돈이 아닌 공포라는 것을. 전망이 너무도 암담해 미래가 없다는 것에 대한 공포. 다가올 내일이 기대와 설렘이 아닌, 순식간에 2배, 3배로 늘어나는 빚에 시달릴 나날일 것이란 절망. 소득의 반 이상을 빚 갚기 바쁜 청년들은 부채가 덫이 되어 발목을 잡는다. 빚에 덜미가 잡혀 다른 생산적인 활동, 창의적인 생각을 할 여지를 잃고 생의 의지가 꺾여버리는 것이다.
한줄기 희망은 헐벗고 주린 지극히 작은 청년들에게 손을 내미는 크리스천들이 있다는 것. 희년은행은 고금리 대출에 시달리는 청년에게 한도 500만 원까지 무이자 전환대출을 제공한다. 일단 신청자를 만나 상담한 후 재정관리 교육을 하고 상황에 따라 전환대출이나 개인 회생의 절차로 안내한다. 사단법인 청년의뜰에서 출범한 청년미래은행 역시 기독교 가치관을 바탕으로 ‘빌려요’라는 이름의 긴급자금 대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이들의 도움으로 빚의 멍에를 벗어난 청년들에게는 그야말로 무한한 가능성이 펼쳐진다.
“빚의 굴레에 허덕이다가 탈출한 분이 말씀해주시더라고요. 정말 죽을 생각까지 했었는데 너무 해방감을 느낀다고.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한테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꿈을 저당 잡히고 가능성을 차단당한 인생에서 미래를 그릴 수 있게 된 거죠. 희년은행을 통해 부채를 해결하고 이후 꾸준히 재무관리를 잘하셔서 결혼 소식을 전해준 분도 계세요. 이젠 안정적으로 직장생활을 하면서 희년은행 조합원으로 참여하며 선순환을 만들어낸 분도 많고요.”
희년은행이나 청년미래은행 모두 기독 청년들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빚에 억눌려 희망을 잃은 청년이라면 누구나 찾을 수 있다.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하지는 않지만 내담자들도 희년은행이나 청년미래은행이 기독교 기관이라는 사실은 안다. 그래서 ‘어렸을 때 교회를 다녔다’거나 ‘가족이나 친구가 교회를 다닌다’며 쑥스럽게 감사인사를 전해오곤 한다.
청년미래은행 이영우 팀장은 지난해 ‘빌려요’ 1기 프로그램을 통해 스포츠토토에 빠져 빚더미에 앉은 청년을 만났다. 저금리 전환대출로 당장의 급한 불을 끄는 것을 넘어 1년간 재정상담을 통해 청년의 일상도 바꿔나갔다. 청년미래은행은 바닥에 내려앉은 줄만 알았던 청년의 인생에 한줄기 빛이 됐다.
“요즘 밥 굶는 사람은 많지 않죠. 그런데 최소한의 생계만 유지할 뿐 빈부격차는 더 벌어졌어요. 젊은 나이임에도 외제차를 끄는 청년이 있는가하면 반대급부로 단기 알바를 전전하며 SNS에 올라오는 그들만의 세상을 지켜만 보는 청년들도 있죠. 사회의 상승기류에 편승하지 못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좌절하는 청년들이 많습니다. 그 격차를 볼 수 있는 눈이 교회에 있었으면 해요.”
요즘엔 ‘청년’이란 이름이 붙은 공공사업이나 정책도 적지 않게 보인다. 누군가는 교회가 왜 청년들을, 그것도 믿지도 않는 청년들까지 도와야 하느냐고 의문을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영우 팀장은 좌절한 청년들에게 새 삶을 선물하는 일이 곧 크리스천의 책무이자 선교라고 믿는다.
“우리가 가진 기독교 정체성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힘든 시대가 됐습니다. 이럴수록 필요한 것은 이 시대의 작은 자를 예수님의 마음으로 섬기며 기독교의 공공성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현실이 절망인 청년에게는 성경을 선물하는 것보다 실질적인 필요에 주목하고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일에 가장 앞선 곳이 교회여야 하고요.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사회선교적인 감각들이 필요한 시기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