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대한민국의 건국일이 언제인지를 놓고 논쟁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의견은 두 가지. 임시정부가 설립된 1919년이 곧 건국이라는 주장과 1948년 남한 정부 수립이 대한민국의 시작이라는 주장이다. 양쪽 다 나름의 논거를 가지고 치열하게 열변을 토하는 가운데 재조명된 인물이 있다. 다름 아닌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우남 이승만이다.
일제강점기에 활약한 독립운동가 중 친일파로 변절한 이들을 제외하면 이승만 만큼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인물도 없을 듯하다. 어떤 이들은 이승만이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공산주의를 막아내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이뤘다며 국부로까지 추앙하는가 하면 다른 이들은 남북 분단에 못을 박고 민주화 운동을 탄압한 독재자라며 비판한다.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만큼 공과 과가 명확한 인물 이승만. 기독교 입국론을 내세우며 독립한 대한민국을 기독교 국가로 세워가고자 했던 기독교인 이승만의 모습과 함께 그의 일생을 다시 조명해 봤다.
옥중에서 하나님 만나다
이승만이 처음 기독교에 대해 접한 것은 아펜젤러 선교사가 설립한 배재학당에서였다. 그곳에서 매일 아침 아펜젤러의 설교를 들었지만 그땐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히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어머니에게 ‘야소교’는 믿지 말라는 신신당부를 듣고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놓고 있었다.
그랬던 그의 마음은 옥중에서 달라진다. 고종의 황제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한성감옥에 투옥됐던 이승만은 마침내 그곳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인다. 감옥에서 신앙적 체험을 한 그는 기독교 건국론의 기초를 담은 저서 ‘독립정신’을 써내려갔다.
1904년 특별사면을 받고 출옥한 이후부터 이승만의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된다. 그해 11월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미국에 건너가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지만 이미 미국과 일본 사이에 가쓰라-테프트 밀약이 체결된 이후여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후 1910년부터 1912년까지 잠깐 귀국했던 기간을 제외하면 광복 전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미국에서 보내며 외교독립에 주력하게 된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잘 알려진 이승만은 일제강점기부터 줄곧 기독교 건국론을 내세웠다. 특히 기독교를 받아들여야만 영국, 미국과 같은 선진국의 반열에 진입할 수 있다고 봤다. 그는 옥중저서인 독립정신의 마지막 구절을 이렇게 쓴다.
“마땅히 우리는 기독교를 모든 일의 근원으로 삼아 각각 나의 몸을 잊어버리고 남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되고, 나라를 한마음으로 받들어 영국·미국 등 각국과 동등한 나라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후 천국에 가서 다 같이 만납시다.”
대통령 취임 후에도 기독교 정책 펴
이승만에게 독립은 일본으로부터의 국가적 독립은 물론이요 유교사상에 물든 개인의 사상적 독립이기도 했다. 그에게 나라의 정치적 독립과 개인의 사상적 독립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였다. 특히 공맹사상을 대체하고 개인의 사상을 일깨울 가치관이 기독교라고 봤다.
해방 이후에도 그는 기독교 건국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당시 해방공간의 우익 3거두라고 불리던 이승만과 김구, 김규식은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1945년 귀국해 김구와 함께 정동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후 연설에 나선다.
“오늘 여러분이 예물로 주신 이 성경 말씀을 토대로 해서 새 나라를 세우려는 것입니다. 부디 여러분께서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반석 삼아 의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매진합시다”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도 제헌국회를 기도로 시작한 일은 잘 알려져 있다. 이후에도 크리스마스를 국경일로 지정하고 군대에 군종제도를, 감옥에 형목제도를 도입하는 등 선교의 길을 넓히기도 했다.
이승만, 어떻게 봐야 할까
이처럼 신앙인으로, 또 정치인으로 교회와 나라에 세운 공이 적지 않은 이승만이지만 기독교계 내에서조차 그에 대한 평가는 논란거리다. 일제강점기 당시 임시정부 대통령에서 탄핵당한 일부터 시작해 한국전쟁 당시 한강철교 폭파, 보도연맹 학살사건 이후 3.15부정선거를 비롯한 독재 등 씻기 힘든 과오를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N교육연구소 심용환 소장은 “자유민주주의 수호자라고 하지만 두 번이나 헌법을 고치며 자유민주주의를 훼손했고 식민지 기간에 실제로 무슨 독립운동을 했는지 입증조차 어렵다”면서 “안창호, 김구, 김규식, 조만식, 이상재 등 독실한 신앙인인 동시에 민족을 대표하는 지도자였던 자랑스러운 선조들이 있다. 이승만을 한국 기독교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내세우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원장 김명섭 교수는 “누구나 공과 과가 있다. 공만으로 우상화해서도, 과만으로 그의 인생 전체를 매도해서도 안 된다”면서 “요즘은 이승만을 독재자로만 기억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4.19혁명만 가지고 이승만의 생애 전체를 평가하는 것은 균형적이지 못하다. 나라의 독립과 호국의 과정에서 그가 보였던 리더십,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등의 공로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하나님의 눈으로, 공의의 눈으로 이승만을 다시 봤으면 한다. 우상화하지 말되 용서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제 그의 과오와 함께 공로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독교 지성이 필요한 때”라며 “대한민국과 한국교회가 눈부신 성장을 이룩한 배경엔 ‘자유’가 있다. 자유가 있는 나라를 만들고 지켜온 중심에 이승만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한다”고 요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