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호주 캔버라에서 열린 WCC 제7차 총회에 하얀 한복을 입은 동양의 여성이 무대에 등장했다. 그녀는 맨발로 종이에 불을 태우며 ‘초혼제’ 의식을 진행했다. 성경 속 인물과 인류 역사 속에서 부당하게 죽임을 당한 영들을 불러내는 듯 이름을 읊조리며 퍼포먼스를 벌인 주인공은 이화여대 2년차 교수였던 정현경 박사였다.
‘오소서 성령이여,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라는 주제로 열린 WCC 총회는 그야말로 혼란에 휩싸였다. 정현경 교수의 초혼제를 보고 정교회 인사들을 그 자리에서 퇴장했고, 보수적 기독교단 회원 역시 ‘무당행위’라고 비판하며 날선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정현경 교수의 ‘초혼제’는 혼합주의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WCC에 대한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당시 총회 소식을 접한 국내 WCC 인사들은 어땠을까. 예장 통합 측 한 관계자는 “초혼제를 지켜보기 역겨웠다. 국내 에큐메니칼 진영 역시 패닉에 빠졌고, 초혼제 의식에 동의할 수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영남신대 박성원 박사는 “당시 초혼제를 접한 정교회는 개인의 영이나, 세상의 영이나, 다른 영들을 성령으로 대체하려는 경향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무속의 형식을 사용한 초혼제에 대해서 역시 심각한 우려를 표했다.
WCC는 이미 종교간 대화 지침서를 통해 “성경을 번역할 때 번역하는 문화의 내용을 너무 차용하든지 아니면 다른 문화의 개념을 무분별하게 사용하면 본질이 모호해질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박 교수는 “정 교수의 초혼제는 바로 이 주의선을 넘어섰다”고 지적했다.
#초혼제 비판 후 신학적 보수와 성령에 대한 경외감 높아져
그렇다면 정 교수의 ‘초혼제’는 WCC에 어떤 변화를 불러왔을까. 초혼제가 혼합주의 경향을 띠고 다원주의를 확산시켰다는 국내 보수진영의 주장과 달리 이 사건을 계기로 WCC는 보수로 회귀하는 흐름이 나타났다. 이 발표로 인해 WCC가 복음과 문화에 대해 연구를 시작하게 됐고, 제4분과 보고서를 통해 보수적 신학을 공식입장으로 수용했다.
혼합주의를 우려할 퍼포먼스가 열린 것은 사실이지만 WCC가 정 교수의 주제강연에 대해 전적 동의를 표하거나 수용한 것을 결코 아니다. 오히려 정 교수의 초혼제 이후 WCC는 신학적 보수와 성령에 대한 경외감을 더 굳건히 할 수 있었다. 또 복음이 문화와 만날 때 나타나는 융합현상을 경계하고 신앙과 복음의 본질을 지키는 일에 더 힘을 쏟았다. 이렇게 WCC 내부에서는 초혼제를 정현경 교수 개인의 행보로 치부하면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해 나갔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당시 받은 충격을 20년 넘도록 간직하며 ‘WCC=혼합주의’라는 공식을 초혼제를 빗대어 주장하고 있다.
‘동성애’ 주장 역시 WCC로써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 WCC 한국준비위원회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동성애 문제에 WCC는 어떠한 공식 입장도 밝힌 바 없다”고 주장했다. 물론 WCC는 인간의 성(性)에 대해 50년 전부터 다뤄왔다.
# 동성애 우려할 부분이지만 성윤리와 함께 나타나는 폭력 비판해야
이는 동성애 때문이 아닌 폭력과 혼전 성경험, 이혼과 다른 종파와의 결혼 등 폭넓은 문제를 포함하고 있었다. 피임과 산아제한, 낙태 등도 성문제에 포함됐다. 서구 사회에서 동성애가 확산되기 시작한 90년대 캔버라 총회에서 일부 동성애 문제가 제기됐으나 교회분열을 야기할 수 있다는 이유로 어떤 입장도 취하지 않았다. 다만 인권차원에서 동성애자에 대한 일방적인 체포와 에이즈 문제, 성폭력, 난민 여성의 피해 등에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성에 대한 논의가 50년이 지나면서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는지는 굳이 WCC가 아니어도 실감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역시 90년대 초까지 죄악시 여겼던 ‘낙태’문제에 대해 교회가 침묵하고 있고, 성직자들의 윤리와 도덕의 기준이었던 ‘이혼’ 역시 헌법을 개정하면서까지 허락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다. 배아 복제 등 유전자 공학에 대해 교회는 무관심하며,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성폭력 문제 등에 대해서도 목회자와 관련된 것이라면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이 오늘의 한국 교회 현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이 근본주의 보수교단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한 교계 인사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성윤리 문제들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마치 동성애만 죄악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오히려 WCC가 문제로 다루고 있는 성(性)의 전반적인 문제와 그에 대한 회개는 한국 교회가 공론화 시켜야 할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 우리에게 남은 하나됨의 과제
국내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는 WCC 총회 개최를 계기로 극단적으로 일어나는 반대운동과 일방적 비판이 에큐메니칼운동의 최종 목표인 ‘하나됨’을 방해하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 ‘하나됨’은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남긴 간절한 명령이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낸 것을 믿게 하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1~22).’
이화여대 장윤재 교수는 “에큐메니즘의 성서적 근거는 예수님의 고별기도에서 찾을 수 있다”며 “교회 일치가 우리의 목표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완고한 교파주의와 개교회주의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장 교수는 또 “에큐메니즘을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창조세계의 회복”이라며 “초자연적인 것에만 관심을 갖는 한국 교회야말로 듣는 말씀인 성서와 보는 말씀인 자연 사이에 끊어진 연결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이번 한국 총회를 통해 폭넓은 지구적 관점에서 인간 뿐 아니라 모든 생명에 화해와 정의, 그리고 치유와 평화가 일어나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확산되기를 희망했다.
이번 WCC 총회의 성공개최가 얼마나 중요한지 세계 교회의 눈이 온통 한국에 쏠려 있음도 장 교수는 주장했다. WCC 중앙위원회에서 ‘한국’을 개최지로 선정한 것은 한국이 가진 잠재성과 독특한 상황에 매료됐다는 것.
당시 중앙위원들은 아시아 국가이면서 인구의 1/4이 기독교인이고, 가장 높은 개신교인 비율을 자랑하면서도 유혈충돌 없이 종교간 평화를 이루고 있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표했다. 또 가톨릭과 복음주의, 오순절과 에큐메니칼 진영이 모두 함께 WCC 총회 유치를 희망했다. 복음 안에서 가톨릭과 복음주의, 오순절과 에큐 진영이 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은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의 새로운 흐름을 한국이 주도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지금 한국 교회는 일부 보수진영의 극단적인 반대운동으로 지역 교회들의 불안감이 가중되고 에큐메니즘의 퇴보와 한국 교회 연합과 일치의 파장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 반대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 지켜내는 일
파행으로 남게 되는 것은 상처뿐이다. 정부 관계자는 “개신교계 대표적 행사인 WCC 총회에 정부 역시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110개 나라 대표들이 참여하는 행사일 뿐 아니라 대사회적이고 전 지구적인 다양한 주제들이 기독교적 관점에서 다뤄지고, 이것이 각 교회와 나라의 의제로 확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WCC 총회가 실패할 경우 개신교가 입게 되는 이미지의 타격은 상당할 것이라는 우려도 전했다.
WCC 총회의 실패는 2014년으로 이어지는 WEA 세계복음주의연맹 총회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 또 2014년부터 2017년까지 불교와 가톨릭 등에서도 세계적인 행사를 예정하고 있어 타종교의 평화적이고 성공적인 개최와 비교할 때 개신교의 분열과 갈등은 종교적 신뢰를 떨어뜨리기에 충분하다는 지적이다.
WCC 총회를 둘러싼 한국 교회의 찬반논쟁을 지켜보는 한 원로 목사 역시 “신학적 반대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인지 되돌아보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금 나타나는 극단적 반대운동은 한국 교회의 분열을 부추겨 이단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 뿐 아니라 안티 기독교 세력에게도 기독교를 비난하는 명분을 준다는 것. 이러한 일들은 모두 교회의 상처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된 이름을 땅에 떨어뜨리는 일”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김명혁 목사 역시 “모두 의인임을 자처하는 시대에 내가 죄인이라는 심정으로 기도하길 바란다”며 “WCC 총회와 WEA 총회 모두 한국 교회 전체가 성숙하게 지켜보고 참여하며 또 그릇된 것은 비판해 옳은 길로 이끄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