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29강) 돼지의 죽음이 전달하는 더 중요한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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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29강) 돼지의 죽음이 전달하는 더 중요한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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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1.05.25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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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라사 광인의 치유

거라사 광인(狂人)의 이야기(막 5:1-20)는 주님이 행하신 네 개의 연속적인 기적 사건 중 하나이다. 바로 앞의 기사, 즉 광풍을 잠잠케 하신 사건에서는 자연의 혼란을 잠재우시는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고(막 4:35-41), 바로 뒤의 기사에서는 인간의 질병과 죽음을 해결하시는 주님의 권세가 잘 드러나고 있다(막 5:21-43). 그리고 오늘 본문의 광인 사건은 사단의 세력을 정복하시는 메시야 예수님의 권세를 잘 묘사하고 있다. 광인 속에 역사하는 귀신을 멸망시킴으로써 주님은 인간을 파괴하려는 사탄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꺾으셨고, 이로써 사탄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승리를 담보해 주신 것이다.

이처럼 마가복음은 전반부, 즉 8장의 가이사랴 빌립보 사건이전까지는 영광의 주(the Lord of Glory)로서의 그리스도의 권세를 잘 드러내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기적을 행하는 자”(miracle worker)로서의 신인(神人, divine man) 개념으로 이해하여, 마가가 당대의 이방인들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님을 이런 방식으로만 소개한다면, 그것은 유대인들이 주님을 정치적 군주(君主)로서 이해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가는 복음서 후반부, 즉 가이사랴 빌립보 사건 이후부터 인류의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난당하시는 여호와의 종(the Suffering Servant of Jehovah)의 모습으로 주님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의 핵심은 사탄과의 대결에서의 주님의 승리이다. 물론 이미 1장에서 우리는 주님이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 들린 자에게서 더러운 귀신을 내어좇음으로써 사탄을 정복하신 것을 알고 있다(막 1:21-28). 그 결과 주님에 관한 소문이 “온 갈릴리 사방”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치유된 광인을 통하여 주님의 관한 소문이 이방인 지역인 데가볼리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막 5:20). 데가볼리는 Decapolis, 즉 열 개의 도시란 뜻으로, 로마의 장군 폼페이가 주전 63년 팔레스타인을 정복하면서 유대인들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킨 이방인의 도시들이다. 아마도 거라사의 광인은 이방인이었을 것이고, 따라서 치유된 광인에 의하여 주님의 관한 복음의 소식이 이방인들에게도 퍼져나가게 된 것을 마가는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마가복음이 로마에 위치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한 까닭에, 주님의 복음이 이미 주님의 지상 사역 기간에 이방인들에게도 전파되었다는 것은 마가와 그 공동체에게는 중요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이방인을 위한 주님의 사역은 두로 지방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치유하신 사건에서 다시금 확증된다(막 7:24-30). 이것은 마태복음의 병행기사와의 비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마태는 주님이 두로와 시돈 지방에 들어가 만난 여자를 그저 가나안 여자라고만 언급하고 있으나(마 15:22), 마가는 보다 구체적으로 그 여자가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밝히고 있다(막 7:26). 즉 여자가 이방인임을 확실하게 지적한 것이다. 그만큼 마가는 주님의 이방인을 위한 사역을 부각시키고 있다고 하겠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 15:24)는 마태복음의 주님의 말씀이 마가복음에는 없는 것이다. 아마도 이는 마태가 그 복음서의 주된 대상인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주님이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복음을 전하고, 또한 기적과 능력을 행하신 것은 참으로 주님이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만인(萬人)의 구주이심에 대한 분명한 증거인 것이다.

어떤 이들은 13절을 근거로 하여 윤리적이고 생태학적 문제를 제기한다(막 5:13). 사실 이 사건은 무화과 나무의 저주 사건(막 11:12-14, 20-21)과 함께 복음서에 기록된 유일한 주님의 파괴적 기적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고대와 현대의 시간적 차이와, 중동과 한국이라는 문화적 차이를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다. 1 세기 유대인들은 더러운 짐승인 돼지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었고, 또한 이방인 소유주들이 입은 피해나 손실에 대하여 역시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주님은 귀신에게 돼지에게 들어가라고 명령하시지 않았다. 다만 허락하셨을 뿐이다. 돼지의 죽음은 인간 안에 숨어있는 마귀를 정복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극적으로(dramatically) 상징하고 있다. 따라서 광인의 회복과 귀신의 멸망은 여전히 돼지의 죽음보다 훨씬 중요한 사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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