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번째 민족대표, 1919년 3.1운동 전 세계에 타전
■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 ‘선교사 열전’ ㉙ 푸른 눈의 독립운동가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서울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최초의 외국인은 푸른 눈의 선교사이다. 어쩌면 찻잔 속 소용돌이처럼 조선 내부의 목소리로 그칠 수 있었던 1919년 3.1 만세운동, 그리고 일제의 잔혹한 탄압을 전 세계에 사진을 찍어 타전한 인물이다. 캐나다장로교 파송을 받아 사역했던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1889~1970, 석호필)가 그 주인공이다.
독립유공자로 추서될 만큼 조선을 사랑했던 스코필드는 오직 신앙만을 기준으로 양심에 따라 행동했다. 일제의 위협에 조금도 굴복하지 않고 조선 사람들의 독립을 지지했던 그를 일경들은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3.1운동의 진상을 해외 여러 정부와 언론에 타전한 그는 불과 이 땅에서 4년 만에 사역을 마치고 사실상 강제 출국 된다. 하지만 캐나다에 돌아가서도 그의 조선 사랑은 식을 줄 몰랐고, 1958년 할아버지가 되어 해방된 대한민국에 돌아와서 후학들을 길러내는 데 일생을 헌신했다.
이 땅에서 ‘석호필’로 살다
캐나다에서 파송받았지만 스코필드는 1889년 3월 영국 워릭셔에서 출생했다.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 친어머니를 잃고 어려운 형편 속에 살아야 했다. 고등학교 과정까지 마친 후 농장에서 일하며 생활을 해결하던 중 1907년 혈혈단신의 몸으로 캐나다 이민을 떠난다. 캐나다에서도 농장에서 일하던 중 그는 토론토대학교에 수의과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대학 2학년이던 1910년 그는 소아마비를 앓아 지팡이를 짚어야 걸을 수 있는 장애를 얻었다. 힘든 여건이었지만 그는 수석을 차지할 정도로 학업에 재능을 나타냈고, 1911년 세균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14년부터 모교에서 강의를 시작한다. 그 사이 1913년에는 피아노를 전공한 앨리스와 결혼하기도 했다.
그런데 1916년 스코필드는 돌연 조선 선교사로 파송 받는다. 아내와 함께 태평양을 횡단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토론토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한 후 조선에서 사역하던 올리버 에비슨 선교사가 스코필드를 초청한 것.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던 에비슨은 1916년 11월 조선에 도착한 스코필드에게 세균학과 위생학을 가르치도록 했다.
그는 대학에서 후학들에게 강의하면서 평소 조선 학생들을 위한 성경반도 운영했다. 조선말을 익히면서는 자신의 이름을 석호필(石虎弼)로 지었고, 그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석호필의 석(石)은 종교적 굳은 신념, 호(虎)는 호랑이와 같은 용맹함, 필(弼)은 돕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선교사로서 굳은 신앙 안에서 조선 사람들을 단호하게 돕겠다는 의지를 담은 작명으로 실제 그는 이름대로 살고자 애썼다. 아내가 건강상 이유로 1년 만에 캐나다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지만 홀로 남아 맡겨져서도 사명에 최선을 다했고, 이 땅의 젊은이들을 말씀으로 양육하고자 힘썼다.
3.1운동을 역사로 기록하다
3.1운동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33명 민족대표 중 16명은 개신교인이었다. 그 16명 독립운동가 중 이갑성은 3.1운동 직전 선교사들을 만나 동참을 요청했지만, 대부분 반응은 미지근했다. 그러나 당시 31살의 스코필드는 달랐다. 이갑성이 사진을 현장에서 찍어달라고 요청하자 흔쾌히 수용했고, 3.1운동 시위 현장에서 직접 역사를 기록했다. 그가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리는 이유이다.
소아마비로 불편한 몸이었음에도 사진을 찍기 좋은 높은 곳에 올라갔다가 일본인 집주인에게 매를 맞기까지 했다. 그는 종로 탑골공원부터 종각, 광화문을 거쳐 덕수궁 대한문까지 군중을 따라 걸으며 사진을 찍었다. 그가 남긴 대한문 앞 3.1만세운동 사진은 전 세계에 독립운동을 알리는 데 사용되었고 지금도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을 증명하는 유일한 사진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갑성 선생은 “스코필드는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하늘에서 보낸 천사와 같았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일제의 가혹한 통치에 강하게 저항했고, 조선 사람만을 향한 애정을 그대로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스코필드는 일제 최악의 만행 중 하나로 전해지고 있는 제암리 학살사건도 카메라에 담아 전 세계에 알린 인물이다. 1919년 4월 15일 3.1운동의 열기가 이어지던 당시 경기도 화상시 제암리와 수촌리 일대에서 많은 양민을 학살됐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심지어 제암리교회에서는 교인들이 산채로 불에 태워졌다. 스코필드는 수원까지 열차를 타고 내려간 후, 다시 일제의 눈을 피해 자전거를 타고 현장을 찾아다니며 몰래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과 기사는 ‘제암리의 대학살’이라는 제목으로 중국 상해에서 발행되던 영자신문에 실렸고, 미국뿐 아니라 다수 나라에 전해질 수 있었다.
한번은 3.1운동 직후 조선총독부 기관지가 서대문형무소를 미화하는 기사를 내자, 이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편지를 보냈고 일제에 강하게 요구한 끝에 직접 서대문형문소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세브란스병원 간호사였던 노경순과 함께 유관순, 어윤희 등을 위문하며 형무소의 실상을 직접 목격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스코필드는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를 찾아가 항의하고 환경 개선을 요구한다. 8월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선교사 80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일제 만행을 알리는 연설을 하고, 수상 히라 다키시를 만나 비인도적 행위 중단을 요구했다. 결국 일제는 1920년 세브란스병원 계약이 만료된 스코필드의 비자 연장을 중단하고 캐나다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끝까지 한국 사람을 품다
캐나다에 돌아가서도 스코필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선의 독립 필요성 역설하고 일제의 억압 통치 실태를 알렸다. 1926년 그의 글에는 “나는 캐나다 사람보다 조선 사람이라고 생각된다”고 할 정도로 그는 여전히 조선을 사랑하고 있었다.
스코필드는 모교 수의과대학에 복직했고 67세로 은퇴하기까지 수의학자로 후학들을 양성했다. 특별히 그는 수의학자로서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고 뛰어난 학문적 성과를 거둔 학자로도 명성이 자자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여전히 젊은 시절의 선교지가 남아 있었다.
1957년 아내 앨리스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이 항공조종사로 일하게 되자 1958년 대한민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국빈으로 초청했다. 한국에 정착해서는 대학에서 수의학을 가르치고 영어 성경반을 운영하며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도왔다. 스코필드의 후원으로 공부할 수 있었던 정운찬 전 국무총리는 “평소에는 잘 생기고 인자한 할아버지였지만 잘못된 행동에 대해서는 단호한 분”이었다고 회고한다.
스코필드는 이승만 정권의 자유당 독재를 단호하게 비판했다. 이승만 독재 이후 5.16사건을 지지했지만 군부의 부패와 자유제한 조치, 군사정권 연장을 목격하고는 박정희 군부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노년기 한국 사람들의 인권과 자유를 위한 목소리를 내던 스코필드는 1970년 4월 12일 81세를 일기로 국립중앙의료원에서 별세했고, 서울 국립현충원에 애국지사 자격으로 안장됐다. 묘비에는 그의 유언 중 일부가 새겨졌다. “내가 죽거든 한국 땅에 묻어주시오. 내가 도와주던 소년 소녀들과 불쌍한 사람들을 맡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