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기획] “받기만 하다간 정체 … 몽골인 자립교회가 필요합니다”
한국이 품은 열방, 다문화 크리스천을 만나다(2) 몽골인 전도사 다쉬 먀그마르수랭 6살 때 부모 따라 한국으로, 기도 응답 체험하며 하나님 만나 교수 꿈꿨던 청년, ‘추수할 일꾼 없다’ 말씀에 신학 공부 결단 “한국교회는 ‘파워풀’ … 몽골의 다음세대 신앙으로 이끌고파”
2년 전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몽골인 목회자 인터뷰를 위해 경기도 광주로 향한 일이 있었다. 치료를 위해 한국에 들어왔다가 그대로 정착해 한국에 있는 몽골인들을 위한 교회를 개척한 누스트 바야라 목사였다.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하는 바야라 목사를 만나곤 적잖이 당황했지만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앳된 얼굴의 청년이 통역으로 섬겨주었던 덕이다.
유창한 한국어로 막힘없이 바야라 목사의 이야기를 옮기는 모습에 그가 외국인일 것이라곤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을 듣고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청년의 이름은 다쉬 먀그마르수랭(Dash Myagmarsure, 미가). 감신대 신대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몽골인 전도사였다. 한국인 못지않은 한국어 실력과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도를 지닌 채 한국과 몽골의 가교 역할을 맡고 싶다는 그를 2년 만에 다시 만났다.
‘마지막’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
“제가 한국어를 잘하는 이유부터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요.”
기자의 눈동자에 맺힌 물음표 부호를 숨길 수가 없었나 보다. 미가 전도사는 그게 제일 궁금할 줄 알았다는 듯 인터뷰 시작부터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털어놨다. 2년 전부터 품고 있던 의문이 체기가 내려가듯 소화되는 순간이었다.
사정은 이랬다. 미가 전도사의 부모님이 먼저 일자리를 찾아 한국 땅을 밟았다. 하지만 몸이 약했던 미가 전도사가 눈에 밟혀 몽골에 남겨둘 수가 없었다. 치료를 겸해 당시 6살이던 미가 전도사도 한국에 따라 들어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별다른 치료를 받지도 않았는데 한국에 오자마자 아픈 것이 싹 나았단다. 돌이켜보면 한국의 몽골인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는지도 모른다.
곁에 두고 돌보기 위해 아들을 한국에 데려오긴 했지만 현실은 이산가족 상봉을 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일자리에 따라 이곳저곳을 옮겨 다녀야 하는 이주민 근로자의 특성상 한곳에 정착을 하기가 어려웠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된 자녀의 교육에는 분명 좋지 않은 여건이었다. 고심 끝에 미가 전도사의 부모는 그를 한국인 목사가 운영하던 기숙사에 맡겼다. 미가 전도사와 비슷한 사정의 몽골 아이들을 돌보는 곳이었다.
“목사님이 운영하는 곳이었으니 당연히 주일마다 교회를 갔어요. 중학교 2학년 때 몽골에 다시 돌아가기 전까지 한국에 있었는데 그땐 신앙이 없었습니다. 습관적으로 다니기만 했고 하나님을 만나진 못했었죠. 저를 기숙사에 보낸 부모님 역시도 명목상 교회에 나가긴 하셨지만 신앙이 없으신 건 마찬가지였어요.”
예수님을 만난 것은 오히려 몽골에 돌아간 다음의 이야기다. 요즘 널리 퍼진 MBTI로 표현하자면 완벽한 ‘I’, 그러니까 내향적이고 소심한 성격을 가진 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 시절부터 낯선 곳을 여기저기 옮겨다녔던 환경 탓에 자신감을 갖기 힘들었다. 누군가의 앞에 서서 발표할라치면 어지럼증이 올라왔다. 그때의 심정을 미가 전도사는 “지구가 도는 것 같았다”고 한국식으로 묘사하며 웃었다.
“한 번은 한국에서 선교팀이 오니 통역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그래서 그 정도는 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설교 통역까지 부탁하시는 거예요. 이야기를 듣자마자 울렁증이 도졌죠. 그래서 그때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면 앞으로 교회를 다니지 않겠다는 마음이었죠. 그러고 강단에 올라섰는데 신기하게도 하나도 무섭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계시고 나를 항상 보호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죠. 소심했던 성격도 그때부터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몽골에 추수할 일꾼이 적다!”
몽골은 기독교 인구가 채 2%도 미치지 않는 나라다. 국민의 절반 가량인 51.7%가 불교, 40.6%는 무종교로 집계된다. 알게 모르게 박해 아닌 박해도 적지 않다. 미가 전도사는 “1990년대쯤 처음 교회를 다녔던 분들 앞에서 제가 겪은 일은 감히 어려움이라고 말하기도 힘들다”고 하면서도 “교회에 다니던 여자아이를 부모가 데려가서 머리를 밀어버리는 일도 목격했다. 교회의 음향 시스템을 도둑맞았는데 경찰은 오히려 ‘교회는 돈이 많지 않느냐’며 넘겨버리는 일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미가 전도사 본인도 ‘교회는 연약한 남자나 가는 곳’이라며 놀림을 받곤 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그에게 그 정도 놀림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몽골의 청년들을 위해 교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 소망이 없는 몽골의 다음세대를 양육하고 복음을 전하고 싶다는 비전이 생긴 것이다. 몽골에서 대학교를 졸업한 미가 전도사가 다시 한국을 찾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석사, 박사 과정을 마치고 고국 몽골에서 교수가 되려고 계획한 것이다. 그래서 처음 선택한 전공은 신학이 아닌 한국학이었다.
“사실 신학을 공부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몇 번 받았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 길은 제 길이 아닌 것 같다고 대답했죠. 그런데 한국에 있는 몽골 사람들이 설날에 모여 연합 캠프를 열어요. 그때 한 목사님이 누가복음 10장 2절을 본문으로 설교하셨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는 말씀이요. ‘기존 목회자들은 늙어 가는데 바통을 이어받을 다음 세대가 없다, 여러분이 세워져야 한다’고 호소하시는데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그때 이 길을 가야겠구나 싶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작은 분당 지구촌교회의 몽골어 예배에서였다. 누스트 바야라 목사도 그 당시엔 지구촌교회에서 몽골어 예배 설교를 맡고 있었다. 그런데 바야라 목사가 개척에 뜻이 있는 것을 알게 됐고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다. 하나는 지구촌교회에 남아서 몽골어 예배를 계속 섬기는 것, 두 번째는 바야라 목사를 따라 몽골인교회를 개척하는 것이었다. 몽골인 자립 교회를 개척하는 것은 누가 봐도 좁은 길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자립 교회를 향한 분명한 소신이 있었기에 굽힐 수 없었다.
영적 성숙을 위해 택한 좁은 길
성도 한 사람이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려면 일요일에 교회만 오가는 것으론 충분치 않다. 예배는 당연하고 섬김과 봉사, 헌금에도 참여해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삶이다. 하지만 대형교회라는 든든한 그늘 밑에서 지원을 받는 몽골어 예배 출석 성도들에겐 ‘야성’이 부족했다. 아늑한 환경에선 광야를 지나 빈 손으로 무릎꿇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는 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요즘은 좀 바뀌긴 했지만 예전의 외국인 사역은 ‘섬김’이라는 측면이 강했어요. 불쌍한 외국인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셨던 것 같아요. ‘예배에 나오는 것만도 감사한데 무슨 헌금을 요구하느냐, 예배 진행과 찬양, 설교도 다 한국교회에서 섬겨주자’라는 생각이셨던 거죠. 마음은 감사하지만 도와주려고만 했지 이들이 영적으로 성장했는지, 성경은 읽고 기도 생활은 하는지, 소그룹 모임은 갖는지 체크하진 않았습니다. 성장이 없다면 훈계도 필요한데 전혀 그러지 않았죠. 하지만 1시간 예배만 드리고 가는 것을 기독교인의 삶이라고 할 순 없잖아요. 몽골에 존재하는 기독교인들의 삶처럼 한국에 있는 몽골인교회 역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좁은 길을 자처해 ‘영원한 찬양 몽골인 교회’를 시작한 지 8년이 지났다. 그 사이 성도들은 어엿한 한 명의 성도로 자라났다. 세례를 받은 이들이 늘어났고 몽골에 돌아가서 고국 교회에서 직분자로 헌신하는 이들도 많아졌다. 무려 몽골에서 목회를 하고 싶다는 이들까지 나오기도 했다. 한국에 있는 몽골인교회 중 처음으로 자립한 ‘영원한 찬양 몽골인 교회’는 지금은 네팔에서 사역하는 몽골인 선교사를 파송하고 후원하기까지 이르렀다.
물론 각오한 만큼 어려움도 있다. 가장 큰 장벽은 역시나 재정이다. 교회 구성원 비율이 근로자보다 유학생들이 많은 터라 사역에 충분한 헌금이 모이기가 힘들다.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 사역과 자매들을 위한 기숙사 운영도 야심차게 시작했지만 녹록지 않은 현실 탓에 잠시 중단해야 했다. 그래도 어려운 환경 속에 꾸준히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는 청년들을 보면 다시 힘이 솟는다.
“한국에 있는 몽골인들의 교회라면 독특하게 바라보실 수도 있지만 교회의 본질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교회가 그렇듯 우리 교회도 성도들이 신앙 안에서 성장해 훌륭한 기독교인 리더로 자라나기를, 이를 통해 몽골과 한국에 있는 몽골인들을 변화시키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몽골인 미가 전도사가 바라본 한국교회는 한마디로 ‘파워풀’하다. 몽골교회와 비교하면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고 엄청난 영적 성장을 이뤘다. 헌신하는 이들도 많고 인재와 자원도 풍부하다. 덩치가 큰 만큼 한 번 움직이기가 어렵다는 그림자도 있지만 그에게 있어 한국교회는 든든한 형 같은 존재다.
한국교회의 장단점을 모두 경험하고 몽골인이라는 정체성까지 보유하고 있는 그는 자신과 같이 어린 나이에 한국에 온 몽골의 다음세대를 향한 비전을 품고 있다.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을 어린 친구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고 싶어서다.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공감하고 조언해주며 무엇보다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자신의 계획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겸허히 순종하려 한다. 어린 시절 한국에 오게 하셔서 신앙을 접하게 하신 하나님, 다시 한국으로 이끄셔서 몽골인 사역을 하게 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에서 몽골인 사역을 계속 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지금은 바야라 목사님께서 아프셔서 잠깐 쉬고 계시고 제가 설교를 도맡아 하고 있어요. 목사님이 돌아오실 때까진 자리를 지켜야 하겠지만 그다음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곳에 발걸음을 맡기려 합니다. ‘영원한 찬양 몽골인 교회’가 한국에 있는 몽골인들을 보듬는 보금자리가 되도록, 그리고 제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쓰임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