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주일학교 부흥의 초석을 놓은 선교사
■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 ‘선교사 열전’ ㉘ 주일학교의 아버지 ‘제임스 고든 홀드크로프트’
140년 한국교회가 유례없는 부흥 성장을 이룰 수 있는 핵심 배경 중 하나는 주일학교이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비롯해 초기 선교사들은 장년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파했고, 성경을 배울 수 있던 주일학교의 첫 대상은 장년이었다. 곧이어 어린이들을 위한 주일학교가 생겨났고,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아이들은 교회의 문턱을 쉽게 넘었다. 당시 아이들은 교회 부흥의 씨앗과 같은 소중한 존재였고,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주일학교가 오늘날과 같이 탄탄하게 세워질 수 있도록 토대를 닦은 선교사가 있다. 바로 미 북장로교 파송을 받아 내한한 제임스 고든 홀드크로프트(James Gordon Holdcroft, 1878~1972), 한국명 허대전 선교사이다.
언더우드 선교사 비서 출신 청년
한국교회 최초의 주일학교는 이화학당 설립자 스크랜턴 여사가 시작했던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동의한다. 1888년 1월 스크랜턴 여사가 시작한 성경공부 모임에 여선교사 4명, 조선 여인 3명과 함께 12명의 어린이가 함께한 것이 기원이다.
이후 선교부마다 주일학교를 개설하기 시작했고, 서울 연동교회, 평양 장대현교회, 남산현교회, 전주 서문교회 등 전국 각처에서 주일학교가 시작돼 부흥하기 시작했다. 조선을 대표해 1907년 로마에서 열린 제5차 세계주일학교 대회에 참석했던 윤치호는 전국에 613개 주일학교가 존재하고, 4만5천여명 학생이 참여하고 있다고 소개한 기록이 남아 있다.
1905년 선교사들은 선교사공의회(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를 조직했다. 1911년 세계주일학교연합회 브라운이 극동아시아 순방 중 서울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선교사공의회는 국내 주일학교운동을 위한 조직 구성을 결의한다.
홀드크로프트는 1912년 국내 6개 선교부 대표와 조선예수교장로회, 미국 감리회 등이 만든 ‘조선주일학교연합회 실행위원회’에서 총무를 맡았다. 위원장은 미 남장로교 스와인하트 선교사였으며, 그때부터 홀드크로프트는 본격적으로 조선의 주일학교가 더욱 부흥 발전하도록 역할을 하게 된다.
한편, 홀드크로프트는 1878년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출생했다. 미주리주 파크대학을 졸업하고 1906년 처음 내한했을 당시 신분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개인 비서였다. 첫 목사 선교사로 조선 땅을 밟았던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어떤 도전을 받았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조선을 향한 애정과 선교 열정만큼은 이 청년에게 그대로 전수된 듯하다.
홀드크래프트는 1909년 뉴욕 바사대학을 졸업, 넬리 코완(Nellie Mary Cowan)과 결혼한 후 다시 조선으로 향했다. 평신도 청년이었던 그는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공부해 목사안수까지 받아 미 북장로교 공식 파송을 받았던 것. 조선에서 사역 경험이 있었고 조선말도 익혔던 탓에 곧바로 평양선교부에서 교회를 맡아 사역했다. 1909년에는 백만인구령운동 순회전도강사로 활약한 이력도 있다. 사역 초기 평양 인근 70여 교회를 돌보며 수많은 영혼의 열매를 거두었고, 평양지역 주일학교를 처음 조직해 교사들을 훈련시키기도 했다.
주일학교 초기 체계를 정립
1910년대 이후 장년보다 어린이·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부흥은 더욱 강력하게 일어났다. 선교사들이 설립한 미션스쿨을 기반으로 신앙이 전해졌고, 주일학교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홀드크로프트는 조선에서 주일학교가 성공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확실한 이유를 갖고 있었다. 1914년 발표한 ‘복음전도 기관으로서 주일학교’ 논문에서 그는 교육을 중요하게 여기는 민족적 특성에 주목했다. 서당과 학당을 중요하게 여기고 자식들을 가르치려고 하는 모습에서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다.
이미 주일학교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1913년 4월 서울 경의궁에서 열린 제1회 조선주일학교대회에는 전국에서 무려 1만4천명이 참석했다. 당시로서는 선교사들뿐 아니라 조선총독부 관계자들까지 놀랄 정도였다고 한다.
홀드크로프드의 역할 중 흥미로운 부분은 1915년 ‘유아반’을 처음 만든 것에 있다. 요즘 교회에서 볼 수 있는 자모실 또는 영아반은 110년의 전통을 갖고 있는 셈이다. 유아반에서는 엄마와 아기가 함께 성경 이야기를 듣는 형태로 운영됐다고 한다.
또 다른 홀드크로프트 업적은 교단과 교파별로 서로 다른 교회학교 직제와 명칭을 갖고 있던 것을 통일했다는 데 있다. 그는 연중 매주일 수업을 하고, 주일학교 임원으로 교장과 회계를 두도록 했다. 연령별 청소년부·중고등부·장년부로 구분하기도 했다. 주일학교 교재가 마땅치 않던 시절,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주일학교 공과를 발간하며 주일학교 교사들을 돕기도 했다. 1917년 그가 간행된 책이 바로 ‘주일학교선생 양성공과’이다.
3.1운동 탄압, 일 총리 만나 항의
홀드크로프드는 1917년 7월 안식년을 얻어 아내와 함게 고국에 갔다가 이듬해 12월에 돌아왔다. 그리고 마주하게 된 역사적 사건이 1919년 3.1운동과 일제의 잔혹한 탄압이었다. 평양에 머물던 그는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무고하게 고초를 겪는 신앙인들을 보면서 격분한 나머지 일본으로 건너가 총리를 만나 항의했다.
할렐루야교회 김상복 원로목사는 1965년 미국 유학 중 홀드크로프트의 집에서 머물던 당시 일화를 글로 전한 바 있다.
“허대전 박사님은 1919년 3월 1일 평양에서 일본 경찰의 무자비한 학살 광경을 사진으로 찍었다고 하셨습니다. 참상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일본으로 건너가 총리를 직접 만나 강하게 항의하셨다고 합니다. 평양으로 돌아오자 얼마 안 있어 군인 출신 총독이 경질되고 민간인 총독이 부임했습니다.”
조선주일학교연합회는 미 북장로회 선교부에 홀드크로프트가 주일학교 사역에 전념하도록 파송을 요청했고, 1920년 선교부는 이를 승인했다. 1921년부터 2년간 건강 문제로 귀국 후 프린스턴에서 신학석사 공부를 마친 그는 1923년 귀국해 주일학교연합회 총무 사역에 전념한다.
1923년 미국 여름성경학교운동 지도자 내쉬의 방한을 계기로 조선에서 ‘하기 아동성경학교’를 도입한다.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여름성경학교의 시작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이후에도 그는 주일학교 강사 양성부 설치, 교회학교 관련 주간지와 월간지 발간, 주일학교대회 개최 등에 기여했다. 1925년 평양에서 서울로 옮겨 사역하던 중 그는 연합회 총무 자리를 후배 선교사 스톡스에게 이양한다.
이후 일제는 전국의 기독교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홀드크로프트는 선교사 대책위원으로 조선총독부와 협상 테이블에서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 신사참배는 강행됐고, 미국 북장로회는 모든 학교의 폐교를 결정한다.
그는 북장로회 한국선교회 회장을 마지막으로 1940년 선교사직을 사임한 후 귀국했다. 보수적 신학노선을 가졌던 그는 해방 이후 고려신학교 설립을 지원하는 등 한국교회와 인연을 이어갔다. 그는 1972년 펜실베니아에서 93세 나이로 별세해 뉴저지 캄든 할레이 공원묘지에 안장됐다. 부인 넬리는 1976년 94세를 일기로 사망해 남편 곁에 안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