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 전과 후를 따지는 ‘극단적 예정론’의 논리는 피해야

박찬호 교수의 목회 현장에 꼭 필요한 조직신학_(89) 전택설과 후택설

2025-01-22     박찬호 교수(백석대 조직신학)
박찬호

신학자들 가운데서 예정론에 대한 토론은 지지하지만 전택설이나 후택설에 대한 논의를 하지 말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 고려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였던 유해무 교수나 백석대학교 역사신학 교수인 김종희 교수 등이다. 전택설이나 후택설에서 문제삼는 것은 “창세 전에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있었던 작정의 논리적 순서”이다. 고작 100년도 살지 못하는 존재인 인간이 ‘창세 전’을 운운한다는 것에 대한 마음속의 거리낌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거기다가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헤아려 보겠다는 것인가? 그 다음에 더 가관인 것은 ‘작정의 논리적 순서’라고 하는 표현이다. 그 부분에 있어서 우리는 이들 신학자들이 전택설과 후택설에 대한 논의를 꺼려하는 이유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면 왜 굳이 전택설과 후택설에 대한 논의를 그것도 지상강좌에서 다루려고 하는가? 그 이유는 극단적인 예정론의 논리를 피하게 해주는 것이 이 토론 가운데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전체 개혁주의신학자들 대부분은 후택설을 주장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전택설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벌코프 『조직신학』을 보면 이 부분과 관련하여 개혁주의신학의 표준문서들이 후택설의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도 전택설을 수용하는 사람들의 양심을 괴롭히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예컨대 도르트 회의의 의장이었던 요한 보거만은 전택설주의자였지만 도르트 회의의 결정인 도르트 신경은 후택설을 공식적인 입장으로 채택하였다.

복음의 보편적인 소명은 성령께서 택자들의 마음 속에서 그 부르심이 들려지게 하실 때에 효력을 발휘한다. 하나님의 선택은 창조 이전이었다. 그러나 그 실제적인 부르심은 역사 속에서 일어난다. 칼빈은 이 둘의 관계에 대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물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전파되는 복음을 듣는데 왜 그 중 얼마만이 반응을 보이는가? 그것은 듣는 자의 선함에 따르지 않음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 대답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은 듣도록 선택하시고 다른 사람들은 선택을 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독교 강요』, III.21.1과 III.24.12).

칼빈이 과연 후대의 토론의 문맥에서 타락전선택설에 가까운지 또는 타락후선택설에 가까운지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첫째로 칼빈은 타락전선택설에 가깝다는 입장이다. “하나님의 선택의 작정은 창조 작정보다도 앞선다.” 둘째로 칼빈을 타락후선택설에 가깝다고 보는 사람들의 입장이다. 셋째로 칼빈에게는 양쪽을 지지하는 증거가 다 있다는 입장인데 그 안에서도 조금씩의 이견이 있다. (1)칼빈은 두 입장 모두를 지지한다. (2)칼빈의 모호성과 비일관성에도 불구하고 칼빈을 후대의 논쟁 가운데 세우면 타락전선택설을 취했을 것이다 (칼 바르트). (3)두 요소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설득력으로 보면 칼빈에게는 타락후선택설에 대한 옹호가 좀 더 있다. 바빙크는 한편으로는 칼빈이 전택설에 이르렀다고 하면서도, 명확히 진술하기를 “…칼빈은 자주 의도적으로 구원과 저주의 2차적 원인 이상으로 나아가기를 거부하고서, 그리하여 자주 후택설적인 방식으로 추론하였다”고 말하고 있다(『개혁주의신론』, 523). 넷째로 칼빈은 실제 역사 안에서의 타락 후의 선택을 지지한다는 주장이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세상과 사람들을 창조하셨다. 그 후에 이브와 아담이 불순종으로 타락하자, 하나님께서는 일정한 백성을 선택하심으로 인간역사에 개입하셨다”는 것이다. 다섯째로 이런 논의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것이라는 주장이다.

어떤 사람들은 칼빈이 아주 분명하게 선택은 “창세 전”부터 있었다고 말하는 것으로부터 칼빈은 타락전선택설의 주장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타락후선택설도 하나님의 모든 작정은 다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런 주장은 타당한 주장이 아니다. 예컨대 도르트 신경은 주장하기를 (1)선택은 창세 전에 있었는데, (2)이는 타락한 인류 전체로부터의 선택이라는 입장을 천명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타락은 역사 가운데서의 타락이 아니라, 작정의 순서는 소위 타락 작정이 먼저 있고, 그 다음 선택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타락후선택설의 입장이다. 우리가 선고(predamnation)를 모든 사람이 받아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선택의 작정이 있는 상황은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서 우리가 이미 상실되어져 있는 상황이라고 본다면 타락후선택설의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선택의 작정이 이미 타락을 전제한 상태에서의 작정(타락후선택)이라고 하면 예정론에 대한 반감은 많은 부분 피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