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씨를 뿌린 33년, 시련에도 열매는 맺혔다

■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 ‘선교사 열전’ ㉕ 몸이 쇠하도록 전도자로 산 ‘루이스 테이트’

2024-11-06     이인창 기자
루이스

미국 남장로교 ‘7인의 개척 선교사’로 조선 땅을 밟았던 루이스 테이트(Lewis Boyd Tate, 1862~1929, 최의덕)는 한결같은 인물이었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전도자로 살았고, 신앙의 원칙을 고수하는 데는 철저했다. 호남지역 최초의 개척지 전주스테이션의 문을 열었고, 은퇴할 때까지 전북지역 곳곳을 순회하는 사역을 멈추지 않았다. 남부지역 특유의 강인함을 가졌으며, 수차례 직접 건축하며 사역지를 세우는 능력을 발휘하기까지 했다. 

‘7인의 개척자’ 조선으로
루이스 테이트는 1862년 미국 미주리주 캘러웨이카운티 옥스배시에서 아버지 칼빈 테이트와 어머니 메리 제인 사이에서 출생했다. 2년 뒤에는 평생 선교사로 함께한 여동생 매티도 태어났다. 캘러웨이는 미국 중서부에 위치해 있지만, 주민 대부분 남부 출신 이주민들이었다. 테이트 부모 역시 남부 출신이었기 때문에 가족들은 남장로교 영향 아래 있었다.  

테이트는 21살 되던 해 웨스트민스터대학에 입학했고, 이듬해 학생자원운동(SVM) 영향으로 해외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된다. 졸업을 앞두고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한 테이트는 1889년 맥코믹신학교에 입학한다. 그의 나의 26세 때이다. 맥코믹 출신으로 이미 조선에서는 다니엘 기포드, 사무엘 마펫, 윌리엄 베어드가 사역 중이었다. 

테이트는 졸업을 한해 앞둔 1891년 조선에서 온 인물의 특별한 강연을 듣게 된다. 테네시 내슈빌에서 열린 전국신학생연맹 집회에서 안식년 차 방문 중이던 언더우드 선교사와 조선인 윤치호의 강연이었다. 테이트가 조선 선교사로 자원하기로 결심한 그 현장에는 7인의 개척자 멤버 그래함 리, 사무엘 무어, 윌리엄 스왈른도 있었다.
테이트는 남장로교 선교부에 조선 파송을 공식 요청했다. 하지만 선교부는 재정 문제로 파송을 거절한다. 그 때 은인처럼 나타난 인물이 언더우드 선교사의 형으로 사업에서 성공한 존 언더우드이다. 그의 후원으로 7인의 개척자는 조선으로 향할 수 있었다. 루이스 테이트는 여동생 매티, 레이놀즈 부부, 전킨 부부, 리니 데이비스와 함께 1892년 8월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를 출발했다. 테이트는 1892년 11월 4일 제물포항을 통해 조선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호남 최초의 개척지 ‘전주지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적응을 적극 도왔다. 조선에 우선 정착한 가운데 테이트는 알렌 선교사가 사용하던 집을 구입해 거점으로 삼았다. 그곳에 직접 집을 더 지었고, 서양 선교사들은 미국 남부지역을 가리키는 애칭 ‘딕시’(Dixie)라고 불렀다. 

남장로교는 1893년 북장로교와 호주 장로교와 협의를 거쳐 호남지역을 사역지로 맡게 된다. 당시 복음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충청지역과 호남지역으로 진출하며,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전주에 선교지부를 열고 본격적인 복음전파 사역을 시작하고자 했다. 

언어를 배우는 것도 어려웠지만,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은 선교지부 개설을 더욱 힘들게 했다. 포기하지 않고 도전한 끝에 테이트와 매티는 1895년 12월부터 완전히 정착해 사역을 전개한다. 테이트는 1897년 7월 호남지역의 모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서문교회의 문을 열었다. 

이 시기, 전주에 한 여성 선교사가 들어온다. 남장로교 소속으로 의료 사역을 위해 파송된 마르타 잉골드가 부임한 것이다. 두 사람은 사랑을 싹틔웠고 1905년 결혼한다. 
한편, 테이트는 직접 건축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선교사들의 집을 여러 채 지었고, 예배당과 진료소 건축도 묵묵히 감당했다. 한번은 고종이 첫 선교지부 위치를 옮겨달라고 요구해 어쩔 수 없이 건축을 다시 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테이트가 다시 헌신해 주었고, 화산지역에 선교지부가 다시 조성됐다. 고종은 대체 토지를 제공했고, 외국인이었던 선교사들이 토지 소유권을 최초로 갖게 됐다. 선교사들은 바로 그 땅에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예수병원 등 신앙 유산이 마련했다. 

세례를 쉽게 주지 않은 테이트
테이트는 1925년 선교사 은퇴할 때까지 시종일관 목회자였고, 전도자였다. 변함없이 순회전도를 실시하며 전라북도 구석구석을 누볐다. 복음을 전하는 조선인 권서들을 교육하고 관리하는 역할도 맡았다.

선교사 중에서도 아주 건강한 편이었던 테이트지만 몇 주간 집을 떠나 순회전도를 하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많이 걸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 목이 쉴 정도로 복음을 전하기도 부지기수였다. 1905년 관련 기록에는 약 500개 마을을 찾아가 말씀을 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테이트는 전북지역에 75개 교회를 개척했으면서도, 일생 1천여명에게만 세례를 베풀었다. 적은 수가 아니지만 그의 선교 열매를 생각하면 의아한 대목이다. 이유는 세례를 주기 위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말뿐 아니라 삶으로 신앙인의 모습을 갖춘 성도들에게 세례를 주었기 때문에, 대상 중에서 탈락자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테이트가 순회전도를 하는 동안 여동생 매티는 전주에 남아 여성사역을 담당했다. 순회전도를 함께 떠나기도 했지만, 전도부인 교육, 교회학교 교육 등을 전개하며 중요한 몫을 감당했다. 아내 잉골드는 초기에는 환자 진료에 집중했지만, 결혼 후에는 남편과 함께 전도자로 더 헌신한다. 어린이와 여성, 초신자를 위한 소요리문답 교재를 만들었고, 새로 파송된 선교사들에게도 아주 유용했다. 이후 1923년 책 『예수교초학문답』으로 출간됐다. 

테이트

길을 내어주고 선교사 은퇴
테이트에게 아주 힘든 시간도 있었다. 곁에서 조사로, 권서로 사역하던 인물 중 훗날 장로교단 총회장 3번을 역임한 이자익이 있었다. 또 윤식명, 최중진이라는 출중한 제자들이 있었다. 

1909년 안식년을 맞은 테이트는 미국에 가기 전 3명 제자에게 자신의 순회전도 구역을 배분했다. 그런데 그 사이 최중진이 선교사들을 향해 불만을 제기하며, 12개 교회를 이끌고 장로교를 탈퇴해버린 것이다. 1910년 귀국한 테이트는 ‘자유교회’라는 이름으로 떠나버린 제자 탓에 심적 고통을 겪어야 했다. 충격은 컸지만 주저앉지 않았다. 그는 다시 전도할 영혼을 찾아 걷고 또 걸었다. 

1918년 가을 순회전도를 하던 중 테이트는 지독한 독감에 걸려 고생한다. 그 시기를 겪고 난 후 그토록 건강하던 테이트의 몸은 예전 같지 않았다. 심장병, 동맥경화, 고혈압 증상이 나타나 사역을 방해했다. 건강이 좋지 않은 가운데서도 순회전도를 반복하던 그는 결국 1925년 은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후배 선교사들과 제자들은 테이트에게 조선에 남아줄 것을 간청했지만, 테이트는 자신이 길을 내어주는 것이 도리라고 판단하고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간다. 기록에 따르면 테이트 부부가 은퇴할 당시 전주에서는 3마일마다 교회가 존재할 정도로 많은 열매를 맺었다. 플로리다에 정착한 테이트는 많은 교회를 다니며 말씀을 선포하고 조선에서 사역을 간증했다. 그러다 1929년 2월 자신이 좋아하던 낚시를 하던 중 배 위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아내 잉골드는 남편과 사별 후 1962년 주님의 부름을 받았다. 
여동생 매티는 독신으로 43년 조선 사역을 마친 후 1935년 은퇴해, 1940년 별세했다. 사망 당시 매티의 손가락에는 평소 ‘약혼반지’라고 부르던, 조선의 성도들이 이별 선물로 만들어준 은가락지가 끼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