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감사는 좀…

이의용의 감사행전 (95)

2024-10-26     이의용 교수 사)아름다운 동행 감사학교 교장, 전 국민대 교수
 

아파트 1층에 살 때다. 우리집 바로 앞 화단에 큰 감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가을이 되면 1층에 산다는 권리(?)로 감을 따서 이웃들과 나누곤 했다. 감을 좋아하는 데다 감나무에 올라가 감 따는 게 재미있어 가을이 기다려지곤 했다. 그런데 감나무 가지는 매우 약해서 조심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꼭대기에 달린 감들은 따지 않고 그냥 놔두었다. 아깝지만 까치 선물로. 다른 데로 이사를 한 후에도, 가을이 되면 감 따던 추억이 늘 떠올랐다.  

어느 회사에서 강의를 하면서 그 감나무 이야기를 했다. 강의를 마친 후 수강생 한 분이 찾아왔다. 자기가 지금 그 아파트에 살고 있다며 반가워했다. 그러면서 뜻밖의 소식을 전해줬다. 우리가 이사한 후 2층에 사는 노인이 감나무 관리를 했는데, 감을 따다가 나무에서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 그 집을 판 후 집값이 엄청나게 오르는 바람에 마음이 여간 불편했던 게 아니다. 게다가 감나무 생각도 나고 해서 집 판 걸 후회하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그 소식을 들으니 조금은 위안이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거기에 계속 살았더라면 내가 그런 사고를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이게 과연 감사해야 할 일인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사람이 죽었는데 말이다. 

우린 인생에서 누군가를 물리쳐야 내가 사는 경우를 자주 겪는다. 영화 <오징어 게임>에서는 상대방을 죽음으로 밀어내야 내가 사는 상황이 연속된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주인공이 상대방을 죽음으로 밀어내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외친다. 그게 과연 감사해야 할 일인지….
어느 방송에서 유명 목사의 하루를 동행 취재하여 방송한 적이 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방송에도 출연하고 강연도 하는 연예인 같은 이였다. 너무 바쁘게 활동을 하다 보니, 비행기 예약을 미처 하지 못해 공항에서 빈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다행히 자리를 구해 탑승구로 향했다. 기내에서 그는 자신을 취재하는 카메라를 바라보며, 자기를 알아본 직원이 순서를 바꾸어주었다며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남의 순서를 가로챈 게 과연 감사해야 할 일인지, 그런 감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실지 혼란스러웠다.

새벽기도 하러 교회 가다 주운 지갑을 
기도의 응답으로 여기는 감사

설교 시간에 들은 얘기다. 어느 교인이 급하게 큰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새벽마다 교회에 나가 작정 기도를 했다. 그러던 어느날 새벽 기도회에 가다가 길에서 지갑을 주웠다. 그런데 그 지갑 안에는 그에게 필요한 만큼의 현금이 들어 있었다. 그는 그걸 기도의 응답으로 받아들이며 감사해 했다고 한다. 그럼, 그 돈을 잃은 이는 뭔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서 교회의 윤리성 회복을 위해 지방 교회들을 방문하며 캠페인을 벌인 적이 있다. 나도 어느 큰 교회에 배당이 되어 저녁 예배 때 강연을 하게 됐다. 예배당도 크고 교인 수도 많았다. 좀 일찍 가서 담임목사님과 여러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예배당 곳곳을 보여주며 여러 이야기를 해주었다. 특히 넓은 주차장과 마당을 안내하면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자랑했다. 그 지역 지자체 고위직 공무원인 그 교회 안수집사가 부근 도로 포장공사를 하면서 교회 주차장과 마당도 함께 포장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공금으로. 안수집사의 신앙, 그걸 자랑하는 목사의 신앙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그날 강연에서는 정작 할 말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 ‘윤리’ 얘기가 먹힐 것 같지 않아서였다. 미리 받은 사례비 봉투도 너무 두툼했고…

초대형 금융 사기범이 엄청난 금액을 교회에 감사헌금 한 게 밝혀져 수사 당국이 되찾아갔다고 한다. 윤리적이지 못한 소득에 감사해도 될까? 불로소득에 감사해도 될까? 노력하지 않고 얻은 횡재에 감사해도 될까? 나에게 이익인 만큼 누군가에게는 손해가 되는데 감사해도 될까?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12) 이렇게 남과 나를 비교하며 감사해도 될까? 

동네 가게에 잘 익은 홍시들이 진열되어 있다. 그걸 보니 문득 그 감나무와 노인 생각이 난다. ‘달콤한 일(甘事)’에만 감사하는 우리의 설익은 감사가, 깊은 성찰을 통해 빨갛게 익어가면 좋겠다. 홍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