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기독교 독립운동가 흔적…“서울 시내에서 찾아봐요”

제79주년 광복절 특집 - 독립운동 발자취 따라가기 서촌과 북촌 등 표석 따라가며 독립운동가들의 삶 조명 서울시, 표석 이용해 난개발로 없어진 문화유적 대체

2024-08-14     김태현 기자
경복궁을

빛이 돌아온 날 광복절. 일제 치하에서 해방돼 자유를 되찾았던 그 날의 기쁨을 기념해온 지 어느덧 79년이 흘렀다. 조국의 독립은 그냥 이뤄지지 않았다. 김구, 이승만, 안창호, 유관순, 여운형 등 우리 역사에서 익히 알려진 굵직한 인물들도 있지만,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자신의 온몸을 바쳐 독립을 위한 삶을 바친 신앙의 선배들이 있었다. 그들은 과연 누구이며 왜 그토록 나라를 사랑했던 것일까.

최근 서울시가 시내 전역에 독립운동가 표석과 동상 등을 활용한 탐방코스를 개발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탐방코스 중 기독교 관련 유적과 인물들이 상당히 많은 것이 눈에 띄었다. 교계 기자로서 호기심이 동했다. 8월의 한복판, 연일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신앙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힘썼던 순국선열의 흔적을 뒤따라보기로 했다.

정말이지 탐방에 나선 지난 9일은 취재에 적합한 날씨가 아니었다. 잠시 걷기만 해도 폭포수 같은 땀이 흘러내렸고, 바지조차 몸에 붙어 살이 쓸리곤 했다. 하지만 자유와 독립을 위해 나아갔던 숭고한 기독교인 독립운동가들의 삶이 주는 감동은 목이 타는 듯한 갈증조차 잊게 만들었다.

경복궁역

서촌에서 찾아본 독립운동
서울시는 이번 독립운동 유적 탐방코스를 개발하면서 표석과 동상 등을 곳곳에 배치했다. 표석은 난개발로 인해 역사적 가치를 가진 건물이 철거된 현장에 설치해둔 비석이다.

서울시가 운영하고 있는 온라인 지도정보 플랫폼 ‘스마트서울맵’을 통해 독립운동 관련 표석을 확인하고 탐방 루트를 세웠다. ‘도시생활지도’ 항목 내 ‘나라사랑 역사의 길’을 통해 나만의 탐방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주시경마당에는

가장 먼저 조선 500년 역사를 고이 간직한 경복궁으로 향했다. 인근에 위치한 서촌이 요즘 각광을 받고 있는 터라 경복궁역에는 젊은이들이 꽤 많이 눈에 띄었다. 이곳에는 일제강점기 한글을 지키기 위해 애쓴 신앙인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바로 현대 한글의 아버지로 불리는 주시경 선생이다.

경복궁역 6번 출구로 나와 도보로 약 8분 정도 걸으니 ‘주시경마당’이 나왔다. 주시경마당은 일제의 문화통치에 맞서 한글의 위대함과 실용성을 알리고 보급하기 위해 노력했던 주시경 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원이다.

주시경마당을 둘러보던 와중 뜻밖의 수확도 얻었다. 그곳에서 누구보다 한글을 사랑했던 푸른 눈의 한글학자, 헐버트 선교사의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헐버트 선교사는 띄어쓰기와 마침표를 한글 표기에 도입하고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등 한글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우리 정부는 주시경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 헐버트 선교사에게는 외국인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했다.

다시 경복궁역을 거쳐 7번 출구 방면으로 15분 정도 걸었다. 그곳에는 항일 무장 투쟁을 벌였던 독립운동가 이회영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초행길이라 지도만 뚫어져라 바라보며 걸음을 재촉하다 적잖이 당황했다. 기념관이 만만찮은 경사의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었던 탓이다.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들이쉬고 다리에 힘을 줬다.

이회영 기념관은 이회영 선생의 일생과 항일 투쟁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었다. 이회영 선생은 집안의 모든 가산을 처분하고 자신과 6형제가 무장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처분한 가산을 현재 공시지가로 하면 2조원이 넘는다고 전해진다. 대대손손 호의호식할 수 있는 재산을 독립운동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믿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행했기 때문이리라.

이회영 기념관에서 또다시 10분 정도 걸으면 어니스트 베델의 집터가 있는 월암근린공원이 나온다. 베델의 집터에 가기 위해 구불구불 산길과도 같은 공원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야 했다. 힘들게 올라간 수고가 무색하게 표석은 작고 초라했다. 표석에는 ‘베델의 집터’라는 글귀가 겨우 알아볼 수 있을 만한 작은 글씨로 새겨져 있었다.

베델은 일제의 만행을 ‘펜’의 힘을 빌려 저지하고자 노력했던 언론인으로 을사늑약의 부당함과 일본의 침탈을 세계에 보도했다. 그가 창간한 대한매일신보는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할 당시 지원금 총합소 역할을 담당했다. 일제는 베델을 눈엣가시로 여겼고 누명을 씌웠다. 그로 인해 베델은 오랜 시간 재판을 치러야 했고, 3주간의 금고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몸이 크게 상한 베델은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눈을 감았다.

북촌에 모여 살았던 독립운동가들
베델의 집터를 뒤로한 채 서촌에서 북촌으로 이동했다. 지하철로 한 정거장을 지나 북촌과 가까운 안국역에 도착했다. 북촌은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따라 걷는 이들에게는 보석같은 동네다. 북촌 곳곳에는 독립운동가들이 거주하던 집터를 알려주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헤이그 특사로 파견됐던 이준 열사의 집터였다. 실은 이준 열사의 집터를 찾느라 한참을 헤맸다. 이준 열사의 집터임을 알리는 표석이 건물과 건물 사이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외로이 공터를 지키는 표석이 열강들의 고래 싸움에 치이는 조국의 현실에 통한의 눈물을 흘렸던 이준 열사의 삶을 대변하는 듯했다.

이준 열사 집터에서 약 5분 가량 걷자 헌법재판소가 나왔다. 헌법재판소 안에는 독립운동가 이상재 선생 집터가 있다. 헌법재판소 부지 안에 있는 이상재 선생 집터에 들어가기 위해선 신분증을 맡기고 방문 목적을 밝혀야 했다. 온종일 헤맨 탓에 시침은 저녁 6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곤란한 내색을 보이는 경비에게 사정사정한 후에야 이상재 선생의 집터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다행히 관리가 잘 된 정원과 어우러진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북촌에서 만날 수 있는 독립운동가 중 가장 대중에 알려진 인물은 ‘여운형’ 선생일 것이다. 이준 집터에서 5분 정도만 걸으면 여운형 집터가 나온다. 소싯적 국사책을 펼쳐봤다면 한 번은 들어봤을 유명한 인물이지만, 집터에는 표석만이 남아 쓸쓸하게 여운형 선생이 이곳에 살았었다는 정보만 전해주고 있다. 특히 표석 옆에 근처 식당에서 가져다 놓은 광고판이 시선을 강탈했고 표석 뒤는 쓰레기 배출 장소인지 쓰레기들이 쌓여있었다. 목숨을 걸고 나라를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부끄러운 대우에 공분마저 솟은 순간이었다.

북촌에서 찾아볼 수 있는 마지막 기독교 독립운동가는 송진우다. 송진우 집터 역시 아주 작은 팻말 정도만 남아 있다. 이 팻말은 특히나 찾기가 어려웠다. 다른 표석들은 그래도 따로 세워져 있었는데, 송진우 선생 집터는 건물에 마치 도로명주소를 표기해 놓은 것처럼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삶을 나타내는 설명마저 부실했다는 점도 아쉬웠다.

많은

대한독립을 위해 힘쓴 외국인
탐방코스를 설계하면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을 꼭 가보고 싶었다. 표석을 따라 걷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광복절을 맞아 순국선열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는 외국인 선교사들을 찾아뵙고 싶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양화진 방문은 처음이다. 설렘과 기대에 가득 차 방문한 양화진의 첫인상은 고요했다. 번잡하고 시끄러운 바깥의 서울이 마치 다른 세계인 양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서 헌신한 선교사들이 묻힌 이곳은 평화롭고 고귀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곳에 잠든 인물들은 하나 같이 이 땅에 복음을 들고 온 선교사들이다. ‘호러스 언더우드’, ‘올리버 에비슨’, ‘어니스트 베델’, ‘호머 헐버트’ 등은 자신이 태어나지도 않은 대한의 독립을 위해 애쓴 인물이다. 그 중 특히 언더우드 일가의 묘소가 눈길을 끌었다. 3대에 걸쳐 이 땅을 위에 헌신하고 이 땅에 묻힌 희생에 잔잔한 감동이 밀려왔다.

대한독립을 위해 초개처럼 자신을 내던진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는 뜻밖에도 우리 주변에 있었다. 독립운동가들을 기념하는 것은 큰맘 먹고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 탐방이었다. 광복절이다. 평소 지나가는 길에 혹시라도 독립운동가의 표석이 있는지 확인해 보고 찾아가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