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르포] “초대교회 향한 예수님의 칭찬과 책망에 위로와 도전 얻었죠”
■ 사도 바울의 발자취 따른 ‘그리스·튀르키예 성지순례’ (중) 백석 농어촌·미자립 교회 목회자 70여명 튀르키예 땅 밟아 사도 바울과 제자들 영향으로 세워진 ‘소아시아 일곱 교회’ 폐허가 된 유적들에서 요한계시록 말씀 새기며 ‘소명’ 다짐
오늘날 인구의 99%가 이슬람 신자인 튀르키예는 본래 신약성경의 주요 무대였다.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사도 바울의 고향이자 뜨거운 ‘선교 열정’이 깃든 곳. 덕분에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 유산이 남아있는 역사적인 땅이다.
특히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품은 튀르키예는 많은 기독교인이 꿈꾸는 성지이기도 하다. 회심 후 자신의 삶을 헌신적으로 바친 사도 바울과 그 제자들의 영향으로 세워진 소아시아 일곱 교회는 안타깝게도 지금은 폐허가 된 채 유적지로 남아있다.
이 가운데 백석총회 농어촌 교회 및 도시 미자립 교회 목회자 70여명이 지난 13일 튀르키예 땅을 밟았다. 마리차강을 따라 그리스에서 튀르키예로 국경을 넘은 백석 성지순례단은 이틀에 걸쳐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모두 찾았다.
목회자들은 현장에서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칭찬과 격려, 책망과 훈계를 생생히 가슴에 새겼다. 이들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라는 성경의 구절이 2천년이 흐른 작금의 교회와 신자들에게도 유효함을 함께 간증했다.
버가모 교회
순교적 신앙 각오
넷째 날 백석 성지순례단이 당도한 곳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버가모 교회’다. 입구에 들어서자 이집트의 태양신을 섬겼던 ‘세라피스 신전’이 한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붉은 벽돌이 거의 무너져 내렸지만 여전히 교만한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세라피스 신전 왼쪽 너머로는 각종 신전이 즐비했던 ‘아크로폴리스’ 언덕이 시야에 걸렸다. 해발 400m에 달하는 가파른 이 언덕에는 아고라와 극장, 도서관, 왕궁, 그리고 로마 황제와 그리스·이집트 신들을 위한 신전들의 잔해가 있어 버가모의 번영했던 시절을 간직하고 있다.
가히 이방 종교의 중심지나 다름 없던 버가모 교회. 요한계시록에서 버가모 교회를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으로 묘사한 이유 또한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자리에서 백석총회 부총회장 이규환 목사는 목회자들에게 ‘우상숭배’가 극심했던 버가모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그는 “간혹 세라피스 신전을 버가모 교회가 허물어진 터로 여기는데, 이는 큰 오해”라며 “버가모 교회란 하나의 ‘건물’이 아니라 버가모 지역에서 ‘믿는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킨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비롯한 초대교회들은 사실 기독교 공동체에 가까웠다”고 부연했다.
그러면서 “다만 세라피스 신전은 나중에 교회로 개축됐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이처럼 사탄의 권좌 위에 세워진 버가모 교회는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게 쉽지 않았다. 이 와중에 발람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라 우상숭배, 맘몬주의, 행음에 빠져 책망을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백석의 목회자들은 어려운 여건에도 ‘끝까지’ 믿음을 지킨 인물 안디바에 주목하기도 했다. 기독교를 향한 핍박과 환란 속에서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은 그는 순교했지만, 주님으로부터 ‘내 충성된 증인’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목회자들은 당시 이방신들이 득세했던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느끼며, 목숨과 맞바꿨던 신앙인들을 떠올렸다. 이규환 목사는 “오늘날 한국교회도 이단의 공격과 세속화에 노출돼 있다”며 “그럼에도 안디바처럼 거룩과 성결을 좇는 여러분이 되길 바란다”고 격려했다.
두아디라 교회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믿음
버가모 교회에서 한 시간 안 돼 달려 도착한 다음 행선지는 현재 ‘아키사르’로 불리는 곳, 바로 ‘두아디라 교회’였다. 버스가 도심 한복판에 정차하자 목회자들은 밀집된 주택과 상점들을 비집고 통과해 금새 두아디라 교회에 이르렀다.
두아디라는 백석 성지순례단이 전날 들렀던 빌립보 교회의 주춧돌이 된 루디아 여인의 고향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목회자들은 석축과 담장만 남은 작은 규모의 두아디라 교회를 둘러보며, 바울을 만난 루디아가 이곳에서도 열심히 복음을 전파했을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 역시 책망을 피하지 못했다. 거짓 선지자 이세벨을 용납한 죄 때문이다. 당시 제조업의 중심지로서 두아디라는 여러 산업이 발달했고 조합이 성행했다. 문제는 조합원들이 트림나스 신전에 제물을 바치고 여제들과 음행을 즐긴 사실이다.
특히 이세벨은 성도들에게 부도덕한 관습에 참여할 것을 선동했다. 음란한 여선지자의 부추김으로 결국 사랑과 믿음의 두아디라 교회는 회개의 기회를 스스로 져버리고 서서히 타락하고 변질됐다.
성공과 출세를 위해 삶과 신앙이 분리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에 목회자들이 먼저 중심을 잡고 바로 서야 한다고 고백한 곡성 반석교회 윤중범 목사는 “한국교회의 영성이 약화되는 상황에서 진정한 복음을 전할 용기가 필요한 것 같다”며 “두아디라 교회에서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믿음’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돌아봤다”고 전했다.
사데 교회
물질의 풍요 속 영적빈곤
백석 성지순례단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지도상 시계 방향으로 순회했다. 이에 따라 다음 목적지는 두아디라 교회에서 남쪽으로 약 48km 떨어진 ‘사데 교회’. 사금 함유량이 높아 금 제련 사업이 활발했던 사데는 ‘황금의 도시’로 불리며, 무척 부유한 곳으로 정평이 났었다.
그렇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 백석 성지순례단이 들여다본 사데의 모습은 난공불락의 도시답게 산기슭에 둘러싸여 흙바람만 날리고 있었다. 화려한 시절을 뒤로하고, 사데 유적은 쓸쓸함이 감돌았다.
사데 교회로 가는 길, 먼저 거대한 기둥들만 남은 아데미 신전을 맞닥뜨렸다. 2천년 전 바로 이 자리에서 사데 주민들은 우상에게 기도를 드렸으리라. 아데미 신전 뒤편으로 가자 비교적 조촐해 보이는 사데 교회가 나타났다.
하지만 아쉽게도 사데 교회는 요한계시록에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며 책망만 받았다. 물질의 풍요 속에서 사치와 향락을 누리던 사데 교회는 결국 ‘영적 빈곤’을 겪었다.
사데교회 앞에 모인 목회자들은 이규환 목사의 인도로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이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잃었던 사데 교회 현장에서 우리의 목양지가 ‘명목상 교회’로 전락하지 않도록, 그리고 ‘영적 생명’을 회복하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이 시간 세상 풍조를 따른 사데 교회에서도 한편으로는 순결한 신앙을 유지한 ‘흰 옷’ 입은 자들을 떠올렸다는 담양 대치영광교회 조진우 목사는 “물질이 신이 되는 황폐한 땅에서도 순결하게 신앙을 지킨 몇 사람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나의 이름이 주님의 생명책에 기록될 날까지 천국 백성으로서 ‘신앙의 절개’를 지키자고 다짐했다”며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아무리 영화로워도 한 순간에 망할 수 있다. 성령충만함으로 늘 깨어있어서 주님이 내게 맡기신 사명을 잘 감당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빌라델비아 교회
선교에 힘쓰는 충성된 종
사데에서 불과 4km 근방에 위치한 ‘빌라델비아 교회’는 전도와 선교에 힘써 칭찬을 받았다. 유적지마다 충만한 은혜를 누린 목회자들은 무더운 날씨도 아랑곳 않고 넷째 날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다섯 곳을 들르는 일정을 무난히 소화했다.
백석 성지순례단이 네 번째로 발걸음을 옮긴 빌라델비아 교회는 그동안 잦은 지진으로 인해 교회를 지탱했던 여섯 개 기둥 중 단 세 개만 남아있었다. 아무리 거센 흔들림에도 끄떡없이 자리를 지킨 기둥들을 바라보면서 ‘충성된 종’의 자질을 떠올리는 목회자도 있었다.
규모로 따지면 빌라델비아 교회는 이전 교회들보다 작은 듯했지만 실상은 탄탄한 내실을 가진 교회였다. 특히 ‘형제의 사랑’을 뜻하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이름처럼 성도들은 서로 섬기며 ‘영혼구원’에 구슬땀을 흘렸고, 마침내 ‘다윗의 열쇠’와 ‘열린 문’의 축복을 받았다.
이규환 목사는 “우리는 교회가 작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포기하거나 불평한다. 그러나 ‘작은교회’도 전도와 선교를 통해 영혼을 구원하는 ‘큰 일’을 이뤄낼 수 있다”며 “이것이 빌라델비아 교회의 능력이자 주님이 가장 기뻐하신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다.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은 ‘기독교의 세계화’라는 부흥으로 이어졌다”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미 열린 문을 주셨다. 열심히 나가서 전도하고 선교하면, 반드시 주님의 때에 예비하신 영혼들이 돌아오는 엄청난 열매를 거둘 것”이라고 했다.
충북 증평평강교회 고영철 목사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사역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야 하는 시골 목회지의 형편에 사실 번아웃이 올 때도 있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새벽에도 교인들이 부르면 찾아가 손발이 돼줘야 하는 까닭에 힘들고 지칠 때도 많았다”고 털어놨다.
그는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돌본 빌라델비아 교회를 보면서 나태했던 목회를 스스로 돌아보고 따뜻한 위로를 얻었다”며 “앞으로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곳에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결단했다.
라오디게아 교회
신앙의 열정을 회복
넷째 날 마지막으로 문을 두드린 ‘라오디게아 교회’ 역시 찬란했던 역사를 뒤로한 채 폐허가 돼있었다. 그러나 동서남북으로 길게 뻗은 대로의 흔적에서, 그리고 지금까지 방문한 다섯 교회 중 가장 광활한 면적을 자랑한 덕분에 라오디게아의 물질적 풍요를 가늠할 수 있었다.
목회자들은 가이드의 안내를 따라 라오디게아 유적 곳곳을 돌아봤다. 높이 치솟은 신전의 기둥들과 상점 또는 가정집으로 예상되는 터가 격자무늬처럼 조성돼 대도시의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단연 눈길을 끈 곳은 ‘예배당’. 오랜 복구와 발굴 작업을 통해 지금의 형태를 보존하게 된 라오디게아 교회는 천장에 보호 구조물이 설치됐다. 내부로 들어서자 정면에 설교단과 함께 세례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정교한 무늬와 세련된 색감의 타일에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자칭 부요한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부족함을 모르고 살던 라오디게아 교회는 끝내 ‘차지도 뜨겁지도 아니한’ 신앙으로 질책을 면치 못했다. 냉수와 온수가 만나는 라오디게아 지역의 특성처럼, 성도들은 세상 문화에 젖어 미지근한 신앙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이규환 목사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이 아닌 세상을 주인으로 삼고 신앙의 열정이 식은 교회였다. 영적인 눈으로 볼 땐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곳”이라며 “사람이 아닌 주님이 보시기에 좋은 교회, 좋은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번성했던 라오디게아 교회가 무슬림에 덮인 현실에 가슴이 아팠다는 울산 임마누엘교회 손영이 목사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한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와 같다. 무너진 성전을 다시 일으키는 마음으로 복음 전파에 힘쓸 것”이라고 각오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