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같은 위기에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선교 사명
■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 ‘선교사 열전’ ⑭ 전남 복음화의 씨앗 ‘유진 벨’
유진 벨(Eugene Bell, 1868~1925), 한국명 배유지 선교사는 1868년 미국 동남부 켄터키주에서 출생해 스코틀랜드계 장로교 집안에서 성장했다. 센트럴대학에 입학해 1891년 최우등으로 학사학위를 받은 그는 유니언신학교와 루이빌신학교에서 수학한 후 1893년 조선 선교사로 파송 받았다. 스승이었던 토마스 드와이트 위더스푼 교수의 딸 로티 잉그럼 위더스푼도 함께 선교사로 임명받았고. 이듬해 둘은 결혼했다. 목사안수를 받은 벨은 아내와 함께 1895년 4월 6일 제물포항을 통해 조선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벨은 전남지역 복음화를 위해 결정적인 씨앗을 심은 선교사였다. 수많은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은 각처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지금도 광주, 전남지역 교회마다 유진 벨의 헌신과 섬김의 역사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선교지부 개척의 길로 떠나다
조선에서 정착은 비교적 수월했다. 언더우드를 비롯해 먼저 온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적극 도와 주었다. 전남 선교를 떠나기 전까지는 전킨, 레이놀즈 등 이미 와있던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만들어둔 딕시(Dixie)에서 약 2년 동안 살 수 있었다. 딕시는 보통 미국 남부 사람들을 부르는 말로,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거주지를 부르는 별칭이었다.
미국 북장로교, 남장로교, 호주 장로교, 캐나다 장로교는 1893년 ‘장로교선교부공의회’를 결성하고, 호남지방 선교를 남장로교에게 맡겼다. 유진 벨보다 먼저 와서 사역하던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성공적으로 군산과 전주에 선교지부를 안착시켰다.
선교를 향한 행진이 전라남도를 향해야 할 때, 유진 벨에게 개척이라는 막중한 책임이 지워졌다. 남장로교 한국선교회는 그를 나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벨이 나주를 여러 차례 방문했지만, 지부 설립은 결국 무산됐다. 지역 주민들은 과거 일본인들이 횡포를 부렸던 것처럼 외국인 선교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오해하며 반대가 심했다.
오히려 이런 상황은 전화위복이 됐다. 목포 개항이 확정되면서 선교회는 자연스럽게 지부 설립 계획을 나주에서 목포로 변경할 수 있었다. 새로 파송 받아온 의료선교사 오웬도 목포에서 합류하도록 했다.
아내의 사망, 선교의 위기
벨의 헌신과 노력으로 남장로교 목포지부는 빠르게 안정됐다. 1899년 오웬 선교사까지 합류하면서 사역에는 엄청난 탄력이 붙었다. 딸 샬럿 위더스푼 벨이 목포에서 태어나는 경사도 맞았다. 오웬은 북장로교 의료 선교사 조지아나 휘팅과 결혼해 의사 한명이 더해졌고, 독신 여선교사 스트래퍼가 사역의 한 축을 감당하면서 제대로 된 진용을 갖출 수 있었다. 벨뿐 아니라 함께하는 선교사들은 전남지역 각처를 다니면서 전도했다. 무안, 영광, 나주, 광주 등에 교회를 개척하고 교육을 시작했다.
그런데 1901년 벨이 회의차 집을 떠난 사이 갑자기 아내 로티가 심장병으로 추정되는 이유로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벨은 5살과 15개월 된 아기를 데리고 귀국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오웬 역시 건강 문제로 일시 귀국하면서 한국선교회는 목포지부를 잠정 폐쇄할 수밖에 없는 위기를 맞았다.
감사하게도 유진 벨은 1902년 12월 목포로 돌아와 선교지부를 재건했고, 그의 복귀 후 전남지역 최초의 교회 양동교회도 설립될 수 있었다.
유진 벨이 남긴 선교 유산
목포를 중심으로 사역이 활성화될수록, 전남 내륙에 선교 거점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그리고 주목한 곳이 광주였다. 이즈음 유진 벨은 군산에서 사역하고 있는 윌리엄 불의 누나 ‘마거릿 휘태커 불’과 재혼했다. 결혼 후 벨은 가족과 함께 다시 개척을 위해 광주로 향했다. 처음 도착해 머문 곳이 지금의 광주 양림동이다. 오웬 역시 목포에서 영산강을 따라 배를 타고 나주 영산포에 도착한 후 도보로 광주에 도착했다.
광주에서 사역은 순식간에 불이 붙었다. 성도들은 스스로 힘으로 교회들을 계속 건축해냈다. 광주만이 아니었다. 벨과 오웬은 전남의 거의 모든 지역을 나누어 순회하며 복음 전파에 매진했다. 광주지부가 개설된 이후 5년 만에 전남 내륙에서 예배 처소는 77개 이상, 세례교인은 1,500명이 넘었다.
유진 벨에게 또 한번의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다. 의료선교를 내려놓고 전도에 전념하던 오웬이 1909년 4월 과로로 인한 폐렴으로 숨지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광주, 화순, 나주, 장흥, 벌교, 광양, 구례, 순천 등 그 넓은 지역을 성실하게 순회하던 오웬은 결국 주님 품에 안겼다. 프레스턴 선교사가 남긴 추모글 일부가 그의 성실한 사역을 보여주며 가슴을 아리게 한다.
“그는 가장 넓은 지역을 담당했고, 다른 어떤 지역보다 더 빨리 성장하였습니다. 그가 사망하기 몇 주 전 작은 딸은 ‘왜 아빠는 집에서 지내지 않나요?’라고 질문했습니다. 이 질문은 수천명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오웬의 충성스러운 노력을 증언합니다.”
낙담할 상황이었지만, 유진 벨은 오웬이 남기고 간 사역지를 안정되게 돌보는 것이 중요했다. 조용하고 성실했던 오웬의 사역지는 이미 조선의 제자들로 인해 든든하게 세워져 있어 놀라기도 했다.
유진 벨은 다시 한번의 큰 사건을 겪으며 선교 사역의 위기를 맞는다. 1919년 서울에서 회의를 마치고 광주로 돌아오던 중 자신이 몰던 차가 특급열차와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뒷자리에 타고 있던 아내 마가렛과 폴 크레인 선교사가 그 자리에서 숨졌다. 벨과 옆자리에 타고 있던 로버트 녹스 선교사는 부상을 당했다.
재판에 회부 될 정도로 큰 사건을 겪으며 유진 벨은 자책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유진 벨은 마가렛과 사이에서 태어난 5살 아이와 함께 귀국했다. 어쩌면 자신을 포함해 다른 선교사들은 조선으로 복귀는 어려울 것이라 여겼을 법했다.
그러나 유진 벨은 1920년 50세 나이에 25년 차 조선 선교를 이어가기로 결단했다. 1921년에는 군산에서 사역하던 줄리아 다이사트와 결혼했다. 줄리아 역시 48세로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서로를 의지하면서 할 수 있는 역량만큼 사역에 임했다. 벨은 평양신학교 강의, 순회 전도사역, 협동 목회, 나환자병원 사역 등 필요한 곳에서 역량을 발휘했다. 그러다 1925년 9월 28일 양림동 선교사촌 집에서 유진 벨은 갑자기 57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사망 원인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조금 일찍 주님 품으로 떠났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선교의 유산은 광주와 목포를 비롯해 전남지역 곳곳에 남아 있다. 특히 그의 후손들은 4대에 걸쳐 이 땅에 남아 그의 선교 사명을 계승하고 있다.
유진 벨의 둘째 샬럿 벨은 항일운동가이자 한남대 설립자 윌리엄 린튼 선교사와 결혼해 4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 자녀 중 국내 결핵퇴치운동에 앞장섰던 휴 린튼(인휴)과 호남신학대 학장을 지낸 드와이트 린튼(인도아)이 있다. 다시 휴 린튼의 자녀 중 유진벨재단 이사장 스티븐 윈 린튼(인세반), 세브란스병원 외국인진료소장으로 최근 국회의원에 당선된 존 올더만 린튼(인요한)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