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에 대한 지식보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이 중요
박찬호 교수의 목회현장에 꼭 필요한 조직신학 _ 61) 하나님을 아는 지식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이중의 계시에 대하여 증거한다. 그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과 인간 의식, 세상의 섭리적인 통치 속에서의 계시와,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 안에 나타난 지식이다. 이와 같은 계시 개념에 적용되는 구분은 주로 인간에게 전달되는 계시의 양식에 근거한 구분이다. 개신교 신학에 있어서, 자연 계시는 종종 사실 계시로, 초자연 계시는 말씀 계시로 불렸는데, 그것은 전자는 사물들 속에서 나타나며, 후자는 말씀 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자연과 초자연 계시 사이의 구분이 상당히 모호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그것은 모든 계시가 원천에 있어서, 또한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내용에 있어서 초자연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연 계시와 초자연 계시라는 구분이 일반 계시(general revelation)와 특별 계시(special revelation)라는 구분으로 대치되게 된 이유이다.
하나님의 존재(existence)에 대해서 우리는 무신론에 반대하여 긍정적으로 대답한 다음, 불가지론에 반대하여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대답하였다. 즉 하나님 편에서 자신을 계시해주심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온전하게 알 수 있다. 그 다음 우리가 물어야 하는 질문은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긍정적인 명제로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을 부정적으로뿐 아니라 긍정적인 명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고 대답하여야 할 것이다. 전자의 입장을 보통 부정신학[negative theology, “하나님께서 모든 사고와 표현을 초월하심을 주장하며 부정과 침묵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방식” (David Ford, The Modern Theologians, 748)]이라 부르는데 전통적으로는 동방 신학이나 신비주의에서 많이 취하는 신학의 방법론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뭔가를 말하기를 매우 꺼려했다. 그 대신에 우리는 하나님을 오직 그분의 위격들을 통해서만 안다고 말하는데 집중했다. 이 점에서 칼빈은 중세 서방 신학에서 벗어나 좀더 원시적인 동방 신학적인 관점 혹은 신비주의적 관점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불행스럽게도, 이러한 변화가 그가 다른 도움 없이 혼자서 성경을 읽은 결과인지, 아니면 그가 읽었던 고대 헬라 교부들의 영향을 반영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칼빈은 발전된 형태의 부정 신학은 그 어떤 것도 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하나님이 본질상으로는 알려질 수 없고 그의 위격들을 통해서 알려질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신적인 본질에 관한 한, 부정 신학이 옳았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것이 위격들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적용될 수 있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Gerald Bray, 『신론』, 123).
우리는 이 대목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제임스 패커(James I Packer, 1926~ )가 제안하고 있는 내용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패커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알면서도 정작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즉 하나님에 대한 개념적인 지식을 가지는 것(knowledge about God)과 바로 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knowledge of God)은 전적으로 다른 것일 수 있다.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바꿀 수 있는가? 이렇게 하는데 필요한 규칙은 간단하지만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 배운 각각의 진리를, 하나님 앞에서 묵상하는 내용으로 바꾸어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찬양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32f).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존재가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에는 무신론자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 세상에는 불가지론자들과 회의론자들이 존재한다.
맥그라스는 『하나님 얼굴을 엿보다』의 결론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결국 모든 세계관의 기반은 믿음이다. 어떤 세계관도 결정적으로 옳다고 증명할 수 없다. 무신론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확실성이 아니라 개연성을 바탕으로 선택한다”(155f). 맥그라스는 스코틀랜드의 설교자 호레이셔스 보나(Horatius Bonar, 1808~89)의 말로 자신의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우리는 외로운 밤을 배회하는 나그네다. 저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에 희미하게 반사된 태양을 보는 나그네일 뿐이다. 그 태양은 이 세상에서는 결코 뜨지 않지만 저 너머에 있는 ‘새 천국’에서는 절대 지지 않는 태양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것만 알아도 어둡고 험한 나그네 길에 위로와 격려가 된다”(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