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선교의 아버지, 고아의 아버지가 되다

한국 기독교 유산을 찾아서 (13) // 고아원에서 학교가 된 ‘언더우드 학당’(상)

2024-06-18     김태현 기자
1886년

“조선 정부에서 설립을 허락해 줄 것 같으니 기도해주십시오. 우선 길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을 모아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잠자리까지 마련하려고 합니다.” -1886년 1월 언더우드의 선교 편지-

한국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언더우드는 우리에게 연세대학교의 설립자로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대학 설립 이전에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부모를 잃고 의지할 곳 없는 아이들을 위해 고아원을 세우는 일이었다.

1885년 4월 5일 조선에 도착한 언더우드는 고종의 부탁으로 3일 후 바로 제중원에서 화학과 물리학을 가르쳤다. 조선에 적응하랴 수업하랴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언더우드지만 집으로 찾아오는 조선 아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돌봤다. 교사의 신분으로 조선 땅에 왔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선교를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자신을 먼저 찾아온 아이들과의 만남이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겼다.

아이들의 대부분은 천민 고아였기 때문에 돌봄의 사각지대에 놓여있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주일학교를 시작했다. 주일학교에 몰려드는 고아들을 개인의 힘으로 돌보는 데 한계를 느낀 언더우드는 정식으로 고아원 설립을 추진했다.

설립과정은 험난했다. 학교와 달리 고아원은 숙식을 책임져야 하기에 경제적 부담이 컸으며, 아이들을 24시간 돌볼 인력도 많이 필요했다. 또 조선정부의 허가를 득해야 했다. 주변 선교사들이 만류하기도 했지만, 언더우드는 고아원 설립을 강행했다.

결국 고종의 윤허까지 얻어내며 1886년 5월 11일에 언더우드는 고아원이면서 교육까지 제공하는 ‘언더우드 학당’을 정식으로 설립했다. 언더우드는 아이들을 보다 더 세심하게 돌보기 위해 자신의 집과 붙어 있는 건물을 매입해 시설로 사용했다.

설립한지 얼마 되지 않아 언더우드 학당에는 40여명의 아이들이 입학했다. 언더우드 학당에서 신앙교육과 기초적인 교육이 함께 진행됐지만, 아이들의 장래와 조선의 미래를 위해서는 정식 교육이 필요했다.

이에 1891년 이름을 예수교학당으로 바꾸며 숙식과 기초 교육만을 제공하는 방식에서 정식적인 ‘학교’로 발돋움했다. 학교가 되었지만 달라진 것은 정규교육과정이 도입되었다는 것뿐이었다. 여전히 집 없는 아이들을 먹이고 재우며 공부시켰다. 예수교학당은 1892년에 민노아학당으로 개명했다가 최종적으로 1905년 경신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경신학교는 오늘날의 경신중학교, 경신고등학교의 모태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