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삶] “하나님을 끝까지 믿으면, 고난도 ‘축복’입니다”

■ 하나님의 기적을 증거하는 찬양사역자 지선 전도사

2024-02-05     대전=김수연 기자

지난 몇 년간 펜데믹의 암울한 터널을 지나면서 CCM ‘은혜’는 교회마다 단골 헌금송으로 등장할 만큼 크리스천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이 곡은 가사도 가사지만 절절한 목소리로 짙은 감동을 선사한 찬양사역자 지선 전도사 덕분에 더욱 빛을 발했다. 그는 이 밖에도 ‘감사’와 ‘충만’ 등 주옥같은 노래들을 부르며, 수많은 성도들의 눈물샘을 자극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동안 국내와 해외를 넘나드는 수천 번의 집회에 초대돼 복음을 전해온 지선 전도사의 찬양이 유독 가슴을 울리는 까닭은 아마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여실히 드러낸 지난 날들의 발자취 때문이리라. 무수한 고난으로 점철된 삶이었지만, 지선 전도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며 기적을 써내려갔다. 무대 위에서 믿음을 고백하는 그를 만나 사명을 들어봤다. 

하나님과 동행한 지난 발자취   
혼신의 힘을 다하는 열정적인 공연과 특별한 간증으로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지선 전도사.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의 집회에 모인 성도들은 지선 전도사의 이야기에 절로 나지막이 아멘을 내뱉는다. 한바탕 울다 웃다를 반복한 성도들과 눈물 콧물로 범벅된 지선 전도사의 얼굴에서 은혜의 깊이를 가늠해 본다.

아이빅밴드를 이끄는 찬양사역자이자 세 아이의 엄마로 치열하게 살아가는 그는 공연해설자, 월드비전합창단 대전반 전임지휘자, 건신대학원대학교 찬양인도학과 교수 등 다양한 수식어가 따른다. 하지만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가 거쳐온 세월은 결코 누구도 쉽게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고되고 힘들었다. 

“제가 15살 때 아버지의 학대로 어머니가 집을 나가셨어요. 남동생과 친척집에 얹혀살게 됐지만 눈칫밥을 먹는 게 일상이었죠. 학교생활은 외로움으로 얼룩졌고 영양실조와 신경성 위염 등 온갖 질병을 달고 살았어요. 하나님이 그저 ‘남의 하나님’처럼 멀게만 느껴졌습니다.” 

상처 투성이인 지선 전도사를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도움의 손길을 보내 거두셨다. 그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본 고교 음악선생님은 어느 개척교회 사모님을 소개하며 무료 성악레슨의 길을 터주었다. 덕분에 단번에 목표하던 음대에 수석으로 합격한 지선 전도사는 여러 교수들의 지원으로 독일 유학의 기회까지 거머쥐었다.  

유학을 떠나기 전 그는 하나님께 뜨겁게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22살 결단한 새벽예배는 지선 전도사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은혜받은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됐어요. 그간 하나님께서 제가 노력하지 않은 것들을 이끌어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죠. 그때 저에게 한걸음 더 다가와주신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그는 한치의 미련도 없이 유학을 내려놨다. 이후 하나님의 예비하심은 더 놀라웠다. 대전시립합창단 소프라노 단원으로 지선 전도사를 부르신 것. 남은 앞날은 탄탄대로였다. 안정된 직장에 결혼과 출산까지…. 복에 복이 잇따랐다. 

당시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싶은 사모함을 주어주셔서 성경필사를 시작했어요. 새신자의 마음가짐으로 다시 시작하자 싶었죠. 그러면서 고난이란 글자가 눈에 들어왔고, 하나님께 제가 이때까지 고난이라고 여긴 것들이 진짜 고난이 아니었음을 성경을 통해 보았다. 이제 진짜 고난을 달라. 감사가 달란트인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주님을 향한 갈망으로 성경필사에 나섰던 2011년 가을 상상도 못할 시련이 닥쳤다. 둘째 아이를 씻기는 동안, 첫째 아이 은찬이가 온몸에 물이 묻은 채로 젓가락 두 개를 콘센트에 넣은 것이었다. 의사는 열 손가락 신경과 관절이 다 끊어져 앞으로 사용할 수 없을 것이라며 장애를 거론했다. 

그날로 대대적인 치료가 시작됐다. 아이의 네 번째 손가락은 바스라져서 한 마디가 사라졌고, 남은 손가락을 살리기 위해 엉덩이 살을 손에 이식하는 대수술이 이어졌다. 은찬이는 고작 5살의 어린 아이에 이틀에 한 번씩 전신마취를 20번이 넘도록 경험해야 했다부모로서 가슴이 미어졌지만, 지선 전도사는 성령이 주는 ‘평안’ 안에 거했다. 

훗날 하나님이 우리 가족의 간증을 어떻게 쓰실지 기대하면서, 끝없는 치료 뒤 예비하심을 믿었어요. 특히 누가복음 2449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는 말씀에 큰 위로를 얻고, 평안함으로 이 성병원에 머물기로 작정했습니다.”

지선 전도사는 이 시간이 언젠가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기억이 되리라고 굳게 믿었다. 원망과 불평 대신 감사를 택한 그는 하나님과 동행한 은찬이와의 병원생활을 사진과 글로 빼곡이 기록해나갔다.

“하루는 은찬이가 ‘수술실에 의사 선생님이랑 예수님이랑 천사 네 명이 같이 들어간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제서야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를 알게 됐죠. 하나님을 끝까지 믿는 자에게는 그 어떤 환경도 결코 저주가 아니라는 걸 말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지선 전도사와 아들 은찬이. 이들 모자를 두고 병원에서는 “최악의 화상환자와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는 엄마가 입원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느날 병원 원목실 목사님이 지선 전도사에게 “화상 환자들 앞에서 찬양을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선뜻 수락한 그는 삼삼오오 모여든 환자들 앞에서 눈을 감고 ‘성령이 오셨네’를 열창했다. 

“찬양이 끝나고 눈을 딱 떴는데,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어요. 하나 같이 병상에 누워있던 환자들이 어느새 다들 벌떡 일어나 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겁니다. 그때 ‘찬양할 수 없을 때 찬양하면 하나님의 의로운 손이 영혼을 붙잡아 일으켜 세우신다’는 걸 체험했습니다.”

동시에 지선 전도사의 가슴 속에선 ‘영혼을 살리는 노래’에 대한 소원이 피어올랐다. 그날로 그는 또 한번 일생일대 큰 용기를 냈다. 꿈의 직장으로 불리던 대전시립합창단에 과감히 사표를 던진 것.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예술의전당보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 영혼이 있는 곳이 가장 귀한 무대라는 걸 깨달았다. 사명을 받은 순간이다. 

하나님은 그의 믿음에 신실하게 응답하셨다. 퇴원 직후 은찬이의 손은 재활을 거쳐 기적처럼 회복됐다. 더불어 깨졌던 원가정의 회복을 선물로 허락하셨다. 

“병상에 있던 은찬이가 한번은 ‘소풍 온 것 같다’고 말하더라고요. 그 순간 무거운 죄의 사슬을 풀어헤치는 기분이었습니다. 오래 품어왔던 부모님에 대한 미움과 슬픔을 회개하고 진심으로 용서하는 마음이 들었죠. ‘그래, 천국 가는 날까지 이 땅에서 소풍 온 듯 살자’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나누는 삶
2012년부터 본격적으로 찬양사역에 발을 내딛은 지선 전도사. 1집 <정결한 그릇>과 2집 <두 번째 고백>에 이어 3집 앨범의 타이틀곡은 <소풍>으로 정했다.
고난 중 거하여도 주 계시니 평안하네. 내가 걸어갈 길을 다 알지 못하지만 언제나 주 계시니 내 삶 소풍 같으리라는 가사에서 그의 진실된 신앙고백을 엿볼 수 있다.

지선 전도사가 처음부터 찬양사역자가 되겠다고 결심했던 건 아니었다. 단지 퇴원 후 전도여행을 떠나겠다고 다짐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늘 그렇듯 예측불허였다. 그는 제가 세운 계획은 무엇 하나 제대로 이뤄진 게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대로 끌려사는 것이 삶의 목표다라고 웃어보였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활발히 활동해온 지선 전도사는 요즘 눈코뜰 새 없이 바쁘다. 아이빅밴드의 정기집회 ‘월간 아이빅 LIVE’를 이끌고 있는 그는 매달 쏟아지는 간증집회 섭외 요청만 평균 50건에 이른다고 귀띔했다. ‘지선’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힘과 위로가 되는 찬양도 전하고 있다. 

교회 주일학교 행사부터 목회자 수련회, 병원, 교도소까지 그를 부르는 곳도 각양각색이다. 특히 지난해 연말 6년 만에 개최한 ‘성탄절 콘서트’는 공연 3주 전 1,600석이 매진되는 기염을 토했다.

그는 “공연 시작 4시간 전부터 전국에서 발걸음한 관객들이 긴 줄을 이뤘다. 암환자부터 군인, 외국인까지 다양한 분들이 와줬다”며 “하나님께서 정말 많은 사람을 살리고 계심에 감사했다”고 전했다. 

“이제까지 다양한 곳에 초청돼 간증과 찬양을 전했는데요. 저의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이 ‘누군가를 용서했다’부터 ‘가정이 살아났다’며 응답을 들려줄 때 제일 보람돼요. 저에게 무대는 에너지를 쏟아내는 곳이자 제 영혼이 살아나는 자리입니다.”  

한편, 지선 전도사는 아들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상황에서도 월드비전 북한사업 후원을 시작했다. 

그는 “아들의 네 번째 손가락 마디가 바스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불현듯 고통받고 죽어가는 북한 동포들이 떠올랐다”며 “나에게 ‘찬양’이란 1907년 평양대부흥 직전 부흥의 불씨를 지피는 사경회다. 언젠가는 북한에서도 찬양하고 집회할 날이 오길 꿈꾼다”고 바랐다.   

지선 전도사는 대전에서 세대와 장르를 아우르는 공연해설자로도 주가가 높다. 시민들에게 뮤지컬·클래식 공연에 대한 해설을 제공하는 건데,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삶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자연스레 녹여내며 복음을 전한다.

복음에 대한 그의 열정은 지칠줄 모른다. 현재 건신대학원대학교 찬양인도학과 교수로 재임 중인 지선 전도사는 ‘후학 양성’에도 온 힘을 기울인다. 1년에 10명만 선발하는 소수정예 제자들은 20~50대 목회자·전도사·평신도들로 구성됐다. 

아직 찬양사역자로서는 이름도 빛도 없는 무명의 제자들을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사비를 털어 제자들이 음원을 발매할 수 있도록 돕고, 4집 앨범은 자신의 자작곡과 제자들의 곡들로 함께 채울 예정이다. 

지선 전도사는 “제가 생각하는 ‘신앙의 경지’는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누리는 것이다. 고난의 때에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 그러면 과부와 고아처럼 주위에 어려운 이웃을 돕게 된다”고 소신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이 소명이 저에겐 찬양사역이고, 소외된 이웃을 후원하는 일이고, 제자들을 길러내는 일이다. 평생 내가 가진 것을 다 나누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며 “저의 가장 큰 기쁨은 ‘한 영혼이 살아날 때’다. 앞으로도 저의 찬양을 통해 한 사람이, 한 교회가, 한 가정이 살아나길 기대한다”고 소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