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독교 산책] “부활 후 하늘로부터 감독직을 받길 소망한 독신주의자”
이상규 교수의 초기 기독교 산책 (102) - 기독교 신앙을 변증한 사람들(19)
멜리토(Melito): 또 한 사람의 2세기 말의 변증가가 루디아 지방의 수도인 사데의 감독이었던 멜리토(Melito, ?~190?)였다. 사데는 성경 요한계시록의 7대 교회 중의 한 곳인데, 이곳을 사르데스(Sardes) 혹은 사르디스(Sardis)로 표기하기 때문에 이곳이 성경의 사데라는 곳임을 모르는 이들이 많다. 멜리토는 라틴식 이름인데 그리스어로는 멜리톤(Μελίτων)으로 표기한다. 그의 생몰연대나 생애여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에베소의 폴리크라테스(Polycrates)는 로마의 감독 빅토르(Victor of Rome, d. 195)에게 보낸 편지에서 멜리토는 “성령으로 충만한 생활을 하다가 사데에서 잠들어 부활의 날에 하늘로부터 감독직을 받기를 기다리는 내시”라고 기록했다. 여기서 그를 ‘내시’(內侍, eunuch)라고 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자발적인 독신생활(마 19:12)을 하는 이었음을 보여준다. 폴리크라테스는 멜리토를 가리켜, 소아시아 지방의 “위대한 별들 중의 하나”라고도 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멜리토가 세련된 문체로 글 쓰는 인물이었고 웅변에도 재능이 있는 인물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여러 정황들을 고려할 때 그는 유스티누스에 비견되는 기독교 사상가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쓴 모든 기록은 다 소실되었고 단편만 남아 있다. 에우세비우스는, 멜리토가 여러 주제에 관하여 쓴 18~20권의 저서 목록을 제시하고 있으나 그 글은 다 소실되었고 글의 제목만 남아 있다. 단지 3편의 단편만 남아 있는데, 그 한 가지가 ‘파스카에 관하여’라는 ‘부활절 설교’이다. 이 글을 보면 멜리토는 당시의 부활절 논쟁에 깊이 관여하였음을 보여준다. 이 당시 부활절 논쟁이란 어느 날을 부활절로 지킬 것인가에 대한 논쟁인데, 논쟁의 핵심은 유월절 어린양으로써 대속의 죽으심을 중요시 할 것인가, 아니면 주의 부활일을 중요시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었다. 부활절이 유월절을 기준으로 주 중(7일) 어느 날이 되든지 유대력 니산월(첫달) 14일에 지켜야 할 것인가, 아니면 주님이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주일)을 지킬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소아시아 기독교인들은 부활절은 니산월 14일, 곧 유대교 유월절에 맞추어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런 주장을 하는 집단을 ‘14일파’(The Quartadeciman)라고 말한다. 멜리토도 이 주장을 지지했으므로 ‘14일파’였다고 할 수 있다. ‘14일파’는 후일 이단으로 정죄된다. 멜리토는 예언에 대한 글도 썼는데, 이는 거짓 예언을 일삼던 몬타누스파의 예언행위를 비판한 내용이었을 것으로 필립 샤프는 말하고 있다. 특히 멜리토는 176년 혹은 177년 경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변증서를 보냈는데, 이 때는 기독교에 대한 혹독한 박해가 있던 시기였다. 멜리토는, 이 박해는 지역적으로 자행된 박해로서 제국정부가 지시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로마제국 차원에서 기독교를 박해 한 것은 네로와 도미티아누스뿐이었다고 말하면서 만일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박해 사실에 대하여 정확한 보고를 받으면 무고한 그리스도인들 위하여 개입해 줄 것이라는 소망을 피력하고 있다. 이 문서에서 멜리토는 기독교를 ‘종교’로서만이 아니라 ‘철학’이라고도 말하고 있다.
그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시리아어로 기록된 다른 변증서가 시리아어로 된 다른 사본들과 함께 타탐(Tattam)이라는 인물에 의해 니트리아 사막의 수도원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글은 1855년 출판되었다. 그러나 이 책에는 에우세비우스가 인용했던 멜리토의 글귀가 포함되지 않았고, 또 기독교를 변호하기보다는 주로 우상숭배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실제로 멜리토의 작품인가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필립 샤프는 멜리토의 작품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백석대·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