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시론] 당사자는 다 옳다
대전에 있는 한 노인요양시설 입구에 걸려 있는 “노인은 다 옳다”는 문구가 떠오른다. 뇌졸중 노인과 치매 노인이 주로 생활하는 노인 전문시설이기에 더더욱 갸우뚱했다. 필자가 교단 내 빈곤 은퇴목회자들의 안식처인 공주원로원에서 2년여 책임을 맡았을 때 노인들의 과거 회귀적인 사고와 노인으로서의 자존심과 자기중심적인 태도 때문인지 모르나 어르신들을 통해 본 것과는 너무 차이가 컸기 때문이다. 평소엔 별다른 표현을 하지 않던 분들조차 가족들이 면회를 오면 식사를 막 마친 후인데도 식사를 제때 주지 않았다거나, 일주일에 한 차례 목욕하는데 전날 목욕을 했음에도 목욕하지 못해 꿉꿉해 죽겠다는 등의 고자질로 자녀들과 곤란한 경우가 다반사였다. 위 노인시설의 원장님은 그런데도 전 직원이 “노인은 다 옳다”는 신념으로 섬기고 돌보겠다는 다짐으로 여겨져 가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말을 받아들이고 성찰하는 엄마의 깨달음 또한 그렇다. 어떤 이의 생각, 판단, 행동이 아무리 잘못됐어도 그의 마음에 대해 누군가 묻고 궁금해한다면 복잡하게 꼬인 상황이 놀랄 만큼 쉽게 풀린다. 자신이 공감받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자기가 감당해야 할 몫이나 대가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책임질 일이 있으면 기꺼이 진다. 자기 마음이 온전히 수용되었다는 느낌 때문이다. 억울함이 풀려서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은 항상 옳다’는 명제는 언제나 옳다.” (정혜신의 <당신이 옳다>에서 인용)
현재 하는 업무상 가난하여 이웃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 폭우와 폭설로 살던 집이 파손되거나, 질병이나 사고 또는 사회적 참사로 가족을 상실한 아픔을 겪은 이들을 이따금 만나게 된다. 엄청난 결핍과 아픔, 그리고 상실로 인해 몸과 마음은 소진되어 있고, 억울함은 점점 부풀어져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인 관심에서 잊혀 가는 것에 대한 분노가 목까지 차 있다. 이분들을 만나서 배려하고 공감하기보다는 설교로 훈수를 두었고, 객관적인 옳고 그름의 잣대로 도덕 강의를 하다가 뒤늦게 반성하기도 한다.
우리가 고난의 교과서로 인정하는 욥기에서 욥이 당한 고난을 위로하려고 달려온 세 친구는 전통의 지혜와 신비적인 경험과 주관적인 확신 가운데 지적을 하면서 욥의 변화를 강권하였다. 친구인 엘리바스가 경험을 바탕으로 신앙적으로 충고하자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욥 6:25)라며 수용하기 곤란함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충고하고 조언하고 평가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는 옳고 그름만 따지면서, 정작 당사자의 처지는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얼마 전에 존경하는 한 목사님과 교회와 총회 관련 말씀을 나누는데 갑자기 필자를 향해 “김 목사는 당사자가 안 돼봐서 몰라.”라고 하셨다.
당사자라는 표현에 필자는 말문이 막혔다. 어떤 일에 직접 관계가 있거나 관계한 사람이 당사자인데 이 당사자에게 하고 싶은 말을 멈춰야 한다. 삼자인 우리는 직접적인 당사자를 용인해야 할 책무가 있다. 당사자의 말은 유안건과 같이 먼저 취급돼야 하고, 당사자의 문제는 장례식과 같이 다른 무엇보다도 앞서도록 추월을 용인해야 한다.
재난과 재해로 가족을 잃은 분들이 토해내는 국가를 향한 원망과 분노, 이해되지 않는 정부의 발표와 대응에 투사가 되어가는 유가족들의 거친 말을 들을 때가 있다. 삼자인 나는 당사자들을 말이 다 옳다고 지지할 수밖에 없다. 당사자는 다 옳다.
소금의 집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