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신·구약 연구(2)

2004-08-22     
김경진의 신약 읽기

사복음서 <2> '예수님 족보를 삼분한 이유'

마태복음 1장 17절에 의하면, 저자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 다윗부터 바벨론 포로 때까지 14대, 그리고 바벨론 포로 이후 그리스도까지 14대로 구분짓고 있다.

2절~6절까지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즉 족장 시대와 사사 시대의 계보이고, 7절~11절까지는 다윗 이후 유다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의 시기, 즉 왕정 시대의 계보이며, 12절~16절까지는 바벨론 포로 이후 예수님의 탄생할 때까지의 시기, 즉 포로 시대와 신ㆍ구약 중간 시대의 계보이다.

왜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이처럼 14대 씩 삼분하고 있을까? 우리가 아는 대로, 누가복음에는 이러한 구분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눅 3:23~38). 이에 대하여는 여태껏 많은 논의가 있어왔지만, 가장 가능성 있는 설명은 마태가 그 배경이 되는 신앙 공동체(혹 교회)의 주 구성원인 유대인들을 염두에 둔 채 유대인들의 문학적 방식인 ‘게마트리아’(gematria)를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아직 아라비아 숫자가 없었던 고대(古代)에서는 히브리어(혹은 헬라어) 알파벳의 낱자에 숫자의 의미를 부여하여 사용하였는데, 게마트리아라는 어떤 이름에 사용된 글자의 숫자의 가치의 합(合)이 어떤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이름은 바로 다윗인데, 왜냐하면 마태복음의 서론인 1장에서 다윗은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으며(6번; 1절, 6<2>, 17<2>, 20절), 그 가운데 주님이 다윗의 자손으로(1:1), 그 육신적 부친인 요셉 역시 다윗의 자손으로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1:20).

아울러 마태복음에서 메시아 칭호로서 마태가 가장 빈번하고도 중요하게 사용하는 것이 또한 다윗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마태는 이 칭호를 그 복음서에서 10번 사용하는데 반해(1:1, 20; 9:27; 12:23; 15:22; 20:30, 31; 21:9, 15; 22:42), 마가와 누가는 각각 3번씩 사용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마태 공동체에서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예수님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까닭에, 마태는 그 복음서에서 이 칭호를 자주 사용함으로써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다윗의 히브리어 dwd(dwd)의 숫자의 가치의 합은 4+6+4=14이다. 그렇다면 마태가 메시아 예수님의 족보를 14라는 숫자를 기준하여 삼분한 것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임을 세 번 반복하여 강조한 결과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마태가 유대인의 독특한 문학적 양식인 게마트리아를 사용하여 예수님의 족보를 삼등분한 것은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예수님을 부각시킨 것으로써, 결국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많은 구약 성경의 성취 구절들과 함께, 구약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임을 드러내는 매우 훌륭한 문학적 방식의 표현인 것이다.

/교수·천안대 기독신학대학원

박종수의 구약 읽기

모세오경 <2> '창조와 안식'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진다(창 1:26). 일반적으로 말할 때 ‘형상’(image)이라는 말은 외형적 모습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외형적인 모습을 알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고대 근동에 널려 있던 신의 형상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추론 할 수도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하나님도 우리처럼 생겼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외면적인 면보다는 일단 인격적인 측면으로 이해하고 그 의미를 살펴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인격적인 모습 역시 한 마디로 설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격은 인간에 의해 규정되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해 그 분의 인격을 제한적으로나마 찾아볼 수는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의 육축과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신다(창 1:26). 창세기 1장에 소개되는 창조 이야기는 왜 인간이 가장 나중에 지어졌다고 말하는가? 해와 달 그리고 하늘과 바다가 없으면 인간은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우리에게 먹거리를 제공하는 동식물이 없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삶을 위해 절대 필요한 것들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 조류와 어류를 만드시면서 번성할 것을 축복하신다(창 1:22). 이것은 인간의 먹이가 되기 위해 번성하라는 말이 아니다. 창조의 계속성을 유지하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번성하라는 말이다.

이처럼 식물과 동물이 인간보다 먼저 지어진 것은 별다른 의미가 있다. 히브리인들이 인간보다 동식물을 앞세운 연유는 뭘까? 그 의미를 찾는다면 그것은 인간의 겸손한 자세를 촉구한 것이라 하겠다. 생태계의 파괴로 말미암아 인간은 생명의 자생력을 잃고 있다. 자연과 하나되고자 했던 우리 조상들의 정신을 지켜왔었더라면 우리의 산하(山河)는 지금처럼 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과 자연과 하나되어 아름다운 세계를 이루라는 하나님의 당부를 기억했더라면 우리의 환경은 이렇게 파괴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인간은 더불어 살기 위한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은 제 칠일에 안식(安息)하신다. 그것은 창조의 중단이 아니다. 새로운 창조를 위한 쉼이다.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도 쉬시는데 하물며 인간은 오죽하랴. 우리는 항상 바쁘다. 바쁘게 일하다 보니 쉼이 없고, 쉼이 없다 보니 여유가 없다. 여유가 없다 보니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지 못하고 우리의 생명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의 안식은 인간의 안식을 의미하며 그 안식을 통해 새로운 창조를 도모해야 한다. 과거를 돌아보며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안전하게 설계하는 것이 안식의 참뜻이다. 이는 인간을 하나님의 쉼으로 인도하면서 동시에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생명에의 길이다.

/교수·강남대 신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