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세상 : 중국식 기독교 ‘태평천국’

2004-08-15     
이단화된 배상제회의 쇠퇴

배상제회는, 10계명 같은 금욕적인 계율을 지키고 여호와를 숭배하면 복을 받는다고 가르쳤다. 엄격한 우상파괴, 유교와 공자에 대한 비판, 유일신 신앙 등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것이었다. 배상제회는 주로 광서성의 농민과 서민들을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했다.

1851년 1월 11일 배상제교는 드디어 태평천국이라는 새 나라를 건국하였다. 3월에는 홍수전이 천왕에 즉위하였다. 태평천국은 바로 지상천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정부군과의 공방전 끝에 1851년 9월에는 영안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12월에는 양수청이 동왕, 소조귀가 서왕, 풍운산이 남왕, 위창휘가 북왕, 석달개는 익왕에 봉해졌다. 최고군사권은 양수청이 장악하였다.

초기에 태평천국은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청나라가 무능했기 때문이다. 둘째, 태평군의 군율이 엄격하였기 때문이다. 셋째, 부자들의 재물을 빼앗아 서민들에게 나누어주어 그들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넷째, 조세와 지대를 면제해 준다는 구호를 내걸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멸만흥한(滅滿興漢)의 구호를 내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특히 1856년부터 태평천국은 급속히 쇠약해지기 시작하였다. 태평천국이 쇠약해진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하나는 지방세력의 거센 저항이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원인은 내부분열이었다. 태평천국은 집단지도체제로 운영되었다. 집단지도체제의 분열이 내부분열로 이어졌다. 홍수전은 창시자로서 천왕으로서의 권위를 갖고 있었지만, 실권을 잡은 사람은 양수청이었다. 바로 여기서부터 갈등의 씨앗이 생겨났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양수청은 홍수전의 권위에 욕심을 내게 되었다. 실권자 양수청은 강력한 리더십으로 카리스마를 높여갔다. 나중에, 양수청은 자신이 성령이라고 주장하여 성령으로서의 권위도 인정받았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태평천국의 이단적 모습이 나타난다.

양수청은 야망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는 위압적이고 독선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음모를 잘 꾸미는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많은 정보원들을 두고 있었다. 그러한 치밀한 정보망을 바탕으로 철저한 감시를 했다. 그래서, 태평천국 내에서는 점차 동왕 양수청에 대한 공포와 불만이 쌓여갔다. 한편, 그의 천재적인 정치력·행정력과 강력한 권력집중은 태평천국이 발전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했다.

양수청의 욕심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1856년 8월 그는 자신에게도 만세 칭호를 달라고 천왕에게 강요하였다. 홍수전은 두려움을 느꼈다. 다른 제왕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때부터 양수청 제거작전이 전개되었다.

9월 2일 천경 근처의 북왕 위창휘 부대가 동왕 양수청을 기습, 살해하였다. 그리고 양수청의 친족과 부하들을 모조리 살해하였다. 약 10일 동안 살해된 사람이 2만 명이 넘었다. 이로 인해 태평천국의 정예군이 소멸되고 말았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익왕 석달개가 위창휘에게 대학살 중지를 요청하였다. 그러자, 북왕 위창휘는 이번에는 익왕의 가족 및 부하들을 학살하였다. 이로 인해 위창휘가 정국을 장악하게 되었다. 한편, 익왕은 복수하기 위해 10만 대군을 이끌고 천경으로 진격하였다. 하지만, 상황을 진압한 것은 홍수전이었다. 홍수전은 양수청의 잔여세력과 자신의 직할부대를 동원하여 북왕 세력을 처단하고 난을 진압하였다. 이것을 천경사변(天京事變)이라고 한다.

홍수전은 양수청이 미웠지만 그 부하들의 도움을 빌어 북왕세력을 진압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고인이 된 동왕 양수청을 미화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양수청은 죽은 게 아니라 승천하여 하나님의 셋째 아들이 되었다고 선포하였다. 첫째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 둘째 아들은 홍수전 자신, 셋째 아들은 양수청이라는 것이었다. 양수청이 살았을 당시에는 양수청이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그가 죽자 양수청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동생이고 지금은 하늘로 돌아갔다고 선포한 것이다. 여기서도 배상제교와 태평천국의 이단적이고 앞 뒤 안 맞는 모습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