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신·구약 연구(1)

2004-08-15     
김경진의 신약 읽기

사복음서 <1>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신약의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로 시작한다.

헬라어 원문에 따라 이 구절을 직역하면, “아브라함의 아들, 다윗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의 책, 즉 족보”이다. 이 번역은 우리 말 어순에 따른 것이고, 원문에는 ‘족보’란 단어가 제일 먼저 나오면서, 마태복음의 제목이자 표지(表紙)가 된다. 일반적으로 두루마리로 된 고대 문서는 오늘날처럼 별도의 표지를 붙일 수 없는 까닭에, 두루마리의 처음 부분이 대개 제목 및 표지의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란 말이 마태복음의 제목이자 표지인 셈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왜 마태는 복음, 즉 예수님의 행하심과 가르치심(행 1:1)을 소개하면서 제일 먼저 족보를 소개하면서, 책 제목을 족보라고 했을까?

첫째로,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어떤 이야기나 사건을 설명할 때 그 첫 머리에 족보를 언급하는 것이 문학적 관례였다(창 5:1; 10:1; 11:10, 27; 대상 9:1; 스 8:1). 이것은 유대인들이 혈통을 중시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아울러 복음서의 배경이 되는 공동체의 주류(主流)인 유대인을 위한 배려가 많이 배어있는 마태복음은 남달리 유대적 요소가 많이 내포되어 있음이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마태는 유대인이 다수인 수신자들의 정서를 반영하면서 유대적 관습을 따라 복음서의 제목으로 ‘족보’를 택하였다고 보인다.

따라서 예수님의 족보가 누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책의 서두가 아닌 중간에(눅 3:23-38) 기록되어 있는 까닭에 유대적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족보의 기원을 첫 사람 아담과 그 이상인 하나님까지 거슬러 올라간 것은 이방인을 위한 복음서의 누가복음의 보편주의적 특징을 잘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된다.

둘째로, 복음서 기자 마태는 족보를 통하여 구약의 유명 인물들과 예수님을 혈통적으로 연결시킴으로써, 주님을 구약이 예언하였던 바로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메시아, 즉 그리스도임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즉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가 예수님 안에서 성취됨을 드러내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서 유대인의 왕위를 계승한 합법적인 유대인의 왕임을 선언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특별히 마태가 속한 교회공동체를 핍박하였던 유대교 회당(會堂)의 공격에 대항하여 매우 유용한 방어이자, 또한 역으로 그들을 설득하는 수단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를 통하여 마태는 다윗의 자손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의 분파 혹 이단이 아니라, 오히려 유대교의 완성(完成)임을 대내외에 천명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마태가 그의 복음서의 제목을 족보로 명명하면서 복음을 족보로 해석한 것은 예수님의 오심이 구약의 예언의 성취로써 인류 구원의 성취자임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단서인 것이다(마 1:21 참고).

/교수·천안대 기독신학대학원

박종수의 구약 읽기

모세오경 <1> 신앙고백으로 성경 읽기

시작이 반이라고 했던가. 창세기를 이해하면 구약성서의 원리를 상당부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어진다. 그만큼 창세기는 성경의 뼈대를 이루는 사상이 많이 담겨있다. 우선 창세기 1장에 소개된 창조이야기에 주목해보자. 하루하루가 넘어갈 때마다 새로운 것들이 창조된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단숨에 모든 것을 창조하지 않고 왜 하나 하나 차례대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을까?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하나님의 창조행위는 인간의 창조적 행위를 위한 모델이다.

첫째 날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빛이 만들어지는데 그 빛에서 어두움이 나누어진다(창 1:4). 빛과 어두움은 처음부터 별개인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였다는 말이 된다. 빛과 어두움을 선과 악의 대명사로 나누어버리는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창조과정에 비추어보면 문제가 많다. 어둠은 빛의 대립적인 개념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의 관계처럼 상호 보완적이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이 있어야 한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낮에 활동하고 밤에 수면을 취한다. 이것은 인간 삶을 위해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질서'이다.

고대 히브리인들 역시 우리 민족처럼 하늘과 땅이 원래 하나였다고 믿었다. 궁창(穹蒼)이라 부르는 하늘이 둘째 날 지어진다(창 1:6-8). 이 궁창의 위 아래는 물이 있다. 결국 궁창 위의 물은 공기 중의 수분이 될 것이며, 궁창 아래의 물은 대양의 물과 땅 속의 물이 될 것이다. 셋째 날 이 물이 정돈되어 바다와 땅이 드러난다(창 1:9-10). 하나님은 땅위의 식물을 말씀으로 생기게 하신 후에 넷째 날 해와 달과 별을 만들어 주야를 밝게 하신다(창 1:12-19). 다섯 째 날에 조류와 어류가 지어지고, 여섯째 날에 동물과 사람이 만들어진다.

그런 후에 일곱째 날에 하나님이 쉬신다. 노동은 쉼을 전제로 한다. 쉼이 없는 노동은 창조적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쉬셨으니 인간도 쉬어야 한다. 그래서 쉬는 것도 창조과정의 일부에 해당된다.

지구는 평평한 모습이며 밤이 되고 낮이 되는 하루는 태양과 달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감히 우리가 사는 땅덩어리가 움직일 리는 결코 없다. 지구는 온 우주의 중심이며 하나님의 축복이 한데 모아진 곳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 이스라엘이 우뚝 서 있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삶 속에서 체험한 모든 것들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에 대한 질문을 했고 그 대답은 하나님의 창조행위로 귀결되었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인간의 생명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그들의 신앙고백이 담긴 이야기가 창조이야기이다. 성경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과학서도 아니요 역사서나 객관적인 종교학 혹은 철학서도 아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겪은 삶의 체험을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기록한 신앙서이다.

/교수·강남대 신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