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례는 마음으로 섬기는 학문이다
‘포정해우’(庖丁解牛)는 장자에 나오는 고사이다. 포정이라는 백정이 소를 잡는 이야기를 통하며 도를 설명하고 있다. 포정은 소의 내면을 정확히 알고 뼈와 뼈 사이의 틈새와 살의 결을 따라 소를 잡기 때문에 19년 동안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어도 그가 가진 칼은 방금 숫돌에 간 것처럼 날이 서 있다고 한다. 물론 이런 높은 경지에 이른 포정도 처음에는 소의 겉모양만을 보는 단견(短見)으로 소를 제대로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마음으로 소를 볼 경지에 이르자 더 이상 감각에 의존하지 않고 소를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다례(茶禮) 또한 이와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차를 격식에 맞게 우리기 위해서는 형식이 필요하지만 높은 경지에 이른 다인(茶人)들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형식을 뛰어넘어 마음으로 차를 우리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서 먼저 차의 향기가 뿜어져 나온다.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대접을 할 수 있고 대접을 받을 수 있다. 그가 어떤 사람, 설령 미워하는 사람을 대하더라도 마음이 담긴 차를 대접할 수 있는 것은 오랜 차 생활의 경험으로 격식을 내면화시켰고 지금도 부단히 그렇게 하도록 노력하기 때문이다. 차의 맛은 다름 아닌 그 차를 우리는 사람의 내면의 맛이 합쳐질 때 비로소 차다운 맛을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것은 자신의 희생으로 인간의 죄를 사하고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분은 한 점 후회함 없이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걸어가셨다. 희생과 섬김의 모범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진정 사모하는 크리스천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겨 나온다. 마찬가지로 차를 진정 사랑하는 다인들에게도 낮은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차가 찻물에 스며들 듯이 말이다. 다례에서 얻은 이러한 습관은 나이에 상관없이 몸에 익힐 수 있지만 될 수 있으면 어린 시절에 몸에 배이도록 하는 것이 좋다.
유아기에 차와 다식을 매개체로 다례놀이를 할 때 차를 마시기전 마음 가다듬기 약속놀이를 한다. 이는 유아기부터 15초 도파민 조절놀이를 통해 정서안정과 자기 조절력을 학습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유아기 때부터 자기조절 학습이 습관화 되지 않을 경우 나도 모르게 ‘욱’하는 경우가 당연히 생긴다. ‘욱’할 때 15초가 중요하다. ‘욱’할 때 대뇌 상태는 도파민이 굉장히 활성화 된 상태다. 이 도파민이 활성화되면 인간의 감정과 행동과 생각에 영향을 많이 준다.
그래서 과하게 도파민이 치솟으면 수치를 낮출 필요가 있다. 한 단계를 낮추는 데 필요한 시간이 15초다. 15초를 확보하면 본인이 분노하고 노여워하고 적개심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는 살아갈 수 있다. 도파민은 두뇌의 여러 곳에 퍼져 있는 신경세포들에 정보들을 전달하여 사람의 기분과 감정과 정신에 영향을 주며 뇌의 시상하부로 전달된다. 시상하부는 콩 하나의 크기 정도로 작지만, 교감신경과 부교감 신경, 내분비 기능을 조절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례(茶禮)는 그냥 차를 만들고 마시는 기능만을 가르치는 학문이 아니다. 별빛과 같이 희생과 섬김을 실천하는 예(禮)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