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 공짜는 없죠. 재난구호도 '선교'입니다"

재난지역서 선교하는 (사)911수색구조단 이강우 대표

2018-08-27     김수연 기자

지난 38년간 한 영혼과 생명 살리기에 헌신
'재난구호'에 대한 관심 절실…죽는 날까지 '선교'

얼마 전 라오스에서 수력발전소 보조 댐 붕괴사고로 수많은 사상자와 피해가 발생하자 전 세계 각지에서 도움의 손길이 쏟아졌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인 현장소식이 한국에도 전해지자 '(사)911수색구조단' 이강우 대표(72세·여의도순복음송파교회)도 늘 그랬듯 익숙하게 구호물자들을 챙겨 짐을 꾸렸다. 그리고 16명의 대원들을 대동해 한 달음에 라오스로 달려갔다.

국내에서 '민간재난구조대의 전설'로 불릴 만큼, 지난 38년간 그 어떤 위험도 마다않고 재난지역 곳곳을 누비며 한 영혼을 살리는데 헌신해온 이강우 대표. 이번엔 라오스에서 열흘간의 수색구조·구호 활동을 마치고 귀국한 그를 직접 만나 결코 녹록치 않았을 그간의 인생 여정과 진솔한 신앙 얘기를 들어봤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다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이강우 대표는 매순간 들이닥친 위기 가운데서도 무사했던 라오스에서의 시간을 이 한마디로 응축해냈다. 까맣게 탄 피부와 깊게 패인 주름이 이제껏 고생을 말해주듯, 라오스를 떠나기 직전 그는 "사실 지쳐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비량 사역인 것도 모자라 때론 남의 목숨을 살리려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내놓는 게 재난구조이기 때문. 하지만 하나님은 이번에도 그를 보내셨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후원으로 비행기 티켓 등 물질을 채우셨고 공산주의 국가이기에 까다로운 공항 입국절차도 별 탈 없이 넘겼다. 

그렇게 한숨 돌리나 싶었지만 공항에서 차를 타고 무려 5시간을 달려 도착한 재난지역은 마치 영화 속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흙탕물이 정강이까지 차올랐고 환자들의 머리에는 벌레들이 기어올랐다. 한 번 물리면 즉사할 수도 있다는 전갈·지네·뱀도 바글바글했다. 그럼에도 아랑곳 않고 911수색구조팀은 수재민들에게 의료·미용·식료품 등 아낌없는 지원을 펼쳤다. 이렇게 좋은 일을 하고도 이강우 대표는 중간에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붙잡혀야 했지만 되레 '땡큐'란 인사를 받고 쉬이 풀려났다.

"심지어는 한국으로 출발하는 날도 예정일보다 하루 앞당겼는데, 나중에 듣고 보니 하루만 그곳에 더 머물렀어도 공항 가는 길에 물이 차올라 고립될 뻔 했던 아찔한 상황이었더라고요. 이렇듯 사람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순간들이 너무 많았지만 결국 털 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히 사랑을 베풀고 온 자체가 기적이고 하나님 뜻이었던 것 같아요." 

최고의 보람은 '영혼 구원'
1981년 설립된 911수색구조단은 현재 2천여 명의 대원들이 회원으로 소속돼있다. 의사·교수 등 직업도 각양각색. 이들은 국민들을 대상으로 교통사고 등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캠페인과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해외서 재난이 일어날 경우 '응급구조사자격증'을 가진 전문가 15~30명을 중심으로 구조대를 결성해 수중·육상·방역 세 팀으로 나뉘어 인명구조 및 구호사업을 벌인다. 그동안 인도·멕시코·필리핀·중국·파키스탄 등 여러 현장에 파견됐다. 

특히 대다수 대원들이 크리스천인지라 유족들을 위로하는 예배 등 틈날 때마다 복음도 같이 전했다. 덕분에 보람과 간증도 넘쳤다. 2004년 스리랑카에 쓰나미가 덮쳤을 때 911수색구조단에 감동 받은 '싱'이란 청년은 전도사가 됐다. 동네 주민들도 마지막 날 돼지고기를 잔뜩 사와 잔치를 열어주며 고마움을 표할 정도로 끈끈한 정을 나눴다.

그런가 하면 전투지에서 총 맞을 각오로 들어갔다는 중국 쓰촨성은 위험하기 그지없었다. 여진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비스듬히 쓰러진 건물 안을 드나들어야 했던 것.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해 마스크를 코에서 뗄 수 없을 지경으로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이강우 대표는 텐트를 치고 끝까지 현지 주민들의 곁을 지켰다. 오죽하면 외신기자들이 911수색구조단을 대한민국이 파견한 정부구조대로 착각했을 정도. 후에 민간구조대임을 안 기자들이 '오 마이 갓'을 외치며 자국 언론에 너나할 것 없이 이 사실을 보도하면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처음엔 우리를 경계하고 거부하던 현지인들도, 나중엔 의심을 거두고 환대해주면 힘든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집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적대적인 이들의 마음 문을 열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죠. 매일 아침 '누군가에게 선을 베풀고 기쁜 마음으로 귀가하는 하루가 되게 해 달라'는 제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해주시는 것 같아요."

선한 사마리아인을 자처하다
그렇다면 911수색구조단이 처음 태동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이를 살피려면 그의 다사다난했던 삶을 먼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의붓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는 생부를 한국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 손에 잃었다. 복수심에 사로잡힌 그는 사고를 몰고 다니는 반항아로 비뚤어진 청소년기를 보냈다. 한창 술과 폭력에 찌들어 살던 어느 날 문득 '복수를 꼭 이런 식으로 할 필요는 없다. 이왕이면 이 힘을 국가를 위해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유년 시절 잠깐 교회를 나갔던 그에게 '맹목적인 탕자 노릇 그만하자!'는 깨달음이 온 것이다. 

그래서 택한 길이 1970년대 초반 '서울시 예비군군악대'를 창설한 것이었다. 대장으로 군악대를 지휘하던 이강우 대표는 정부 주요행사를 거의 도맡았고 대통령마저 칭찬할 정도로 큰 명성을 누렸다. 그는 "그런데도 정신을 못 차리고 한껏 교만했던 시기"라고 털어놨다. 그러던 찰나 이강우 대표는 운명처럼 나간 교회에서 성경 누가복음에 나온 '선한 사마리아인' 설교를 듣고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사마리아인은 부자도 아니고,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웃에 선을 베풀었다는 목사님의 말씀이 제 가슴과 귀에 내리 꽂혔습니다. 기독교 안에 진짜 '사마리아인 같은 사람'이 있으면 내가 하나님을 믿어도 되겠다 싶었는데… 어쩌면 그게 저의 삶이란 믿음이 솟구쳤죠. '너희도 그와 같이 가서 행하라'는 구절이 순식간에 제 사명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때마침 뉴스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달동네를 중심으로 연탄가스에 의한 사망사고 소식이 끊이질 않았다. 70~80년대 넉넉지 않은 형편에 연탄은 중요한 난방재료였기 때문. 가난했던 시절이라 병원도 귀했다. 동네 의원도 6시면 문을 닫아 응급환자들은 갈 데가 없었다. 이강우 대표는 연탄가스 중독환자나 고혈압 환자 등을 긴급히 후송·치료해줄 의료지원이 절실하다고 느꼈다. 지금의 911수색구조단 효시인 민간 차원의 '한국인명구조단'은 이렇게 생겨났다.

"젊은 나이였지만 군악대장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마치고 아내에게 '인명구조단을 만들고 싶은데 구급차를 살려면 돈이 필요하니까 집을 파는 게 어떻겠느냐' 물었어요. 그러자 아내가 흔쾌히 웃으면서 '맘대로 하세요' 하는 게 아니겠어요? 그길로 바로 집을 팔아 사무실을 구하고 운전면허가 있는 군악대원 후배들과 함께 뜻을 모아 야간에 전화 받고 출동하고 그랬죠. 대신 광고비가 없어 온 동네방네 확성기를 들고 다니면서 '긴급환자가 발생하면 연락주세요! 무료로 병원까지 후송해드립니다!' 외쳤습니다."

죽는 날까지 '재난구호선교'
그렇게 정신없이 달려온 세월이 어느덧 40여년이다. 물론 그도 연약한 사람인지라 분명 그동안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을 터. 재난피해를 지원해주면서 가장 큰 장벽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해 물었다. 첫째로 '언어'였겠거니 싶었는데 의외로 영어와 보디랭귀지가 있어 괜찮았단다. 그럼 '재정'이었냐 물었더니 그것도 아닌 듯 보였다. "하나님은 참 재밌는 분이에요. 늘 필요한 돈보다 살짝 모자라게 주세요. 그래서 울고불고 매달리면 그때 가서 채워주시고 '네게 이런 계획이 있었다' 말씀하시죠." 

그런데 이내 이강우 대표의 입에선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다른 건 그래도 견딜 만한데… 가끔 한국인들이 우릴 외면할 때 참 외로워요. 현지에선 한국인들끼리 정보도 주고받고 협력하면 좋은데 가령 택시요금으로 오히려 바가지를 씌운다든지, 한인회나 대사관의 협조를 구하기도 어려울 때가 있어요. 국내에서도 공무원 혹은 성도들마저 재난에 대해 무관심할 때 마음이 아프죠. 그럼에도 이 모든 걸 각오하고 떠날, 상처받지 않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재난구호선교'에 대한 열정을 다지기도 했다. "복음에 공짜는 없습니다. 당장에 집을 잃어 춥고 배고픈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말로만 하면 영혼구원이 일어나기 힘들어요. 고난에 처한 이웃에게 떡이라도 한 덩이 떼 주고 잘 곳도 마련해줘 가면서 함께 울고 웃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도 느낄 여유가 생기죠. 이런 게 진정한 선교 아닐까요? 제가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한이 있어도 죽는 날까지 재난구호선교를 하고 싶은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