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 종교개혁사 ③십자가의 신학-루터의 하이델베르크 논쟁(하)
주도홍 백석대학교 부총장 / 역사신학
종교개혁자 루터는 교회 분열을 전혀 의도하지 않았고, 중세교회가 새로워지길 원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1517년 95조를 통한 루터의 교회 비판은 의도하지 않게 교회의 일치를 깨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루터가 1518년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 제시한 ‘십자가의 신학’은 한국교회를 포함한 세계 교회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며 마음을 다해 귀담아 들어야 할 소중한 내용이며, 본질적 복음이라 할 것이다.
특히 과연 신학이 무엇인가를 묻는 사람들에게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은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 과연 한국의 신학자들은 십자가의 신학을 얼마나 알고 있으며, 얼마나 십자가의 신학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다르게는 그들은 과연 ‘영광의 신학자’들인가 아니면 ‘십자가의 신학자’들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1518년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 루터가 말하는 ‘십자가의 신학’에 주목한다. 당시 루터는 오늘날 A4 종이 크기로 계산하면 약 14쪽에 해당하는 토론문을 작성했다. 루터는 먼저 40조를 제시하고, 그런 후 조목조목 성경을 제시하며 40조에 해설을 덧붙였다. 루터의 해설은 신학적 명제에 무게를 두었고 철학적 명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간단한 언급을 할 뿐이다.
언뜻 보기에 명제만으로는 이해가 어려울 수도 있지만, 해설을 보면 ‘십자가의 신학’의 뜻이 분명하다. 잘못된 신학을 직시하며 루터는 옳은 신학을 제시한다. 그 신학은 십자가의 신학으로 중세교회가 추구하는 ‘영광의 신학’과 반대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바른 신학과 신이해가 나온다. 바른 신학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 당하신 그리스도의 고난 가운데 숨어계신 하나님을 바로 깨달아야 한다. 잘못된 ‘영광의 신학’은 고난보다는 업적을, 십자가보다는 영광을, 약함보다는 능력을, 어리석음보다는 지혜를 그리고 나쁨보다는 좋은 것을 취한다.
이는 “십자가의 원수”(빌3:18)로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을 미워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실적과 명예를 사랑하는데, 이는 십자가의 선함을 나쁨으로, 공로의 부끄러움을 좋은 것으로 뒤집어놓는다. 하나님은 오직 십자가와 고난 가운데서 발견되어진다. 바른 신학자들은 십자가의 친구들로서 십자가를 선한 것으로, 인간의 공로를 나쁜 것으로 일컫는다.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의 공로는 무너졌고, 인간의 공로를 통해서 형성된 ‘옛 아담’은 십자가에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을 사랑하면 할수록 그들은 회칠한 무덤같이 되고 점점 깊은 늪에 빠져 타락하고 더 심한 갈증에 시달린다. 이를 해결하는 단 한 가지 방법은 이러한 욕망을 버리고 돌아서는 것이다. 누구든지 지혜롭게 되고자 하면, 지혜를 향해 뒷걸음을 쳐야 하며, 어리석음을 추구해서 단순한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누구든지 권력, 명예, 쾌락을 그리고 그 모든 것에서 배부르기를 원한다면 그는 마땅히 권력, 명예, 쾌락 그리고 모든 것에서 만족하기를 추구하기보다는 그것으로부터 멀어져야 할 것이다. 세상에 대하여 어리석은 자 되는 그것이야말로 바로 진정한 지혜이다.
또한 루터는 인간의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과 구별하며 설명한다. 인간의 사랑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대상으로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대조적으로 죄에 속한 것, 나쁜 것, 어리석은 것 그리고 약한 것을 사랑하는데, 결국 의로운 것으로, 선한 것으로, 지혜로운 것으로, 강한 것으로 바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