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으로 만나는] 한국교회의 능동적 참여를 이끈 연합사업

(18) 한국교회의 연합사업 II

2015-08-04     김목화 기자

세계 기독교의 교파 연합 및 합동 분위기를 접한 한국 선교사들도 한국에서 같은 교회 합동운동을 역설했다. 하지만 한국 기독교인들의 반응은 냉정했다. 교파를 초월한 하나의 ‘조선교회’를 수립해야 한다는 명제에 대해서는 이의를 달지 않았으나, 이미 교파 별로 정착한 장로교 및 감리교 교회의 현실을 도외시한 물리적인 합동을 우려하고 있었다.

당시 ‘기독신보’의 사설, ‘조선교회를 연합함이 엇던가’를 보면 그 점을 분명히 지적한다.

 

“연합은 병합이 아니로다. 병합은 제일의 강자가 제이의 약자를 병솔하는 거시오 연합은 공동일치가 되야 상조상의하야 일체를 작성하는 거시니 주의 몸된 교회가 엇지 서로 소원냉담함이 가하리오 그런즉 이 문제는 중대막심 한즉 처연이 제출키도 외람스럽고 창졸간 해결하기도 또한 염려스러운 바인즉 지금부터 5, 6 성상 후에 완전히 해결키를 희망하고 그동안 장·감 양 고등회에서 가부의 3분의 2를 취하야 연구위원을 선택하야 깊히 연구한 후 엇더한 결과를 취하야 결정함이 가할가 하노니 원컨대 형제들이여 묵상중 실행적으로 연구할지어다.”

 

1905년 교회 합동을 강력하게 요구했다가 교리적인 문제보다는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실패를 체험했던 한국교회로서는 선교사들이 주축이 된 교회 합동운동에 대해 섣불리 동조하고 나설 형편이 못되었다. 더욱이 한국교회는 3·1운동으로 인해 막대한 인명, 재산 피해를 당했고 교회 지도자들이 대거 투옥되었거나 해외로 망명해 내부적인 정비가 더욱 시급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조선예수교장로회나 미감리회조선연회, 남감리회조선연회 등 장·감 두 교회에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한 흔적은 없다. 다만 기존의 장·감 협의기구들을 변화시키는 방향으로 연합운동이 전개되었다.

결국 1919년 한국의 ‘교회합동’ 운동은 당시 한국교회의 내적문제를 고려하지 못한 선교적 열정으로만 추진되어 ‘하나된 교회’를 향한 구체적인 시도도 하지 못한채 막을 내렸다. 그러나 기존 초교파선교연합기구였던 조선장감연합협의회가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로 발전하면서 한국인의 비중이 늘어났다. 또 국내외 선교사업에 대한 한국교회의 능동적 참여가 가능해졌다는 점에서 긍정적 변화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