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으로 만나는] 탐관오리로부터 백성들의 피난처가 되어준 교회
(5) 초기 한국교회의 사회적 역할과 위상
“이번에 새로 난 북도 군수 중에 유세력한 양반 한 분이 말하되 예수교 잇는 고을에 갈 수 업시니 영남 고을노 옴겨 달난다니 엇지하야 예수교 잇는 고을에 갈 수 업느뇨 우리교는 하느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도라 교를 참 믿는 사람은 엇지 추호나 그른 일을 행하며 관장의 영을 거역하리오 그러나 관장이 만약 무단이 백성의 재물을 빼슬 디경이면 그거슨 용이이 빼앗기지 아닐 터이니 그 양반의 갈 수 업다는 말이 그 까닭인듯.”
구한말 우리말 표기가 눈에 띄는 이 글은 1897년 창간된 ‘대한크리스도인회보’의 1899년 3월 1일자 보도기사다. 이 짧은 내용에서 우리는 당시 시대상과 기독교의 사회적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볼 수 있다.
기사 내용을 다시 살펴보면, 지방의 한 관리가 기독교인이 많은 고을로 가기를 꺼려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백성의 재물을 빼앗기 쉽지 않기 때문이라는 내용도 덧붙였다.
당시 기독교가 수탈당하는 백성들을 위한 보호기능을 할 뿐 아니라 부패 관리에 적극적인 항의를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해 이만열 전 국사편장위원장은 “반봉건 의식이 심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소극적으로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항거했던 기독교적 지성을 보여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당시 시대상에 대해 C. E 샤프 선교사는 “기독교로 오는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첫 번째 동기는 보호와 힘의 욕구다. 시기가 불안정한 연고로 사람들은 서로 도움을 얻기 위해 상호 결속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샤프 선교사는 교회에서 출교당한 한 지방관리가 주민들에게 정치적 보호를 받기 위해서라면 친일단체인 일진회보다 기독교에 들어가라는 권유를 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1900년 전후 조선의 인구는 약 1천200만명으로 추산된다. 반면 1899년 미국 감리교회와 장로교회가 작성한 당시 교세 통계를 보면 각각 2천616명, 9천364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고작 일만명을 조금 넘는 정도였다. 그렇다면 ‘대한크리스도인회보' 기술에 나타나는 교회의 위상은 놀랍기만 하다.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떤지 우리를 성찰하게 한다. 결국 교회는 세력의 종교가 아님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