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위복의 사나이? “늘 더 좋은 걸 주시는 하나님, 땡큐!”

2014-07-15     이성원 기자


토익 한류 여는 ‘토익킹’ 김대균 원장

‘전화위복’이란 말이 있다. 화가 변해서 오히려 복이 된다는 뜻이다. 이 사자성어가 딱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 토익(TOEIC)에 관한 한 독보적인 기록을 많이 가지고 있는 ‘토익킹’ 김대균 원장(김대균어학원). 200여 회 이상 토익 실전 경험자, 세계 최다 만점자, EBS토익 10년 연속 강의자, 17년 연속 최장수 토익 강사, 40여 종 토익 저서 저술과 한국 일본 동시 베스트셀러 기록자, 토익 한류의 개척자 등. “어휴,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여기까지 못왔죠”라고 말문을 연 그의 전화위복 인생 이야기는 가난했던 고등학교 1학년 시절부터 시작된다.

자습서 살 돈 없어 사전 샀더니
날 때부터 가난하지는 않았다. 녹용과 잉어를 수시로 고아 먹었던 어린 시절 덕분인지, 그는 지금도 몸이 좋다. 하지만 아버지가 가까운 사람에게 사기를 당하면서 하루아침에 자습서 한 권 살 돈도 없는 신세가 됐다.

“얘들은 영어시험을 쉽게 보는데 나만 어려운 거에요. 알고 보니까 선생님이 자습서에서 그대로 문제를 내시더라고요. 자습서 살 돈이 없어서 헌 영영사전을 찾으며 힘들게 공부했죠.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자 가난해서 자습서 못산 게 오히려 영어 기초를 잘 닦는 계기가 된 거죠. 나중에 고려대 영문과 들어가서 타임반 회장을 할 때에도 덕을 많이 봤어요.”

장학생으로 대학을 다니면서 한 여자를 사귀었다. 연세대 다니던 교회 친구였다. 그러나 여자 친구의 부모님은 그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가난한 가정에 고작 영문과 나와서 무슨 장래성이 있겠느냐’하는 반응이었다. 점차 둘 사이도 다투는 일이 잦아지면서 헤어졌다. 그러나 그 아픔이 쓴 약이 됐다. 그는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고 유학보다 토익 강사로 진출했는데, 그게 그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처음에는 YBM에 독해 강사로 시험을 봐서 합격했다. 자기 학원 강사들을 자랑할 요량으로 강의를 들어보라던 원장에게 그는 혹평을 날렸다. 그날로 잘렸다. 4년 후쯤에 그 원장에게 연락이 왔다. “다시 뽑으니까 와봐.” 이번엔 토익 강사로 들어갔다. 그게 대박이었다.

처음 독해 강사로 들어갔을 때 안잘렸더라면 저는 아마 평범한 영어 강사로 끝났을지 모릅니다. 독해는 그후에 사라졌거든요. 인기가 없었던 토익이 그때부터 서서히 관심을 모았고요. 독해 대신에 토익을 하게 된 게 오히려 잘된 거죠. 처음에 잘렸을 때에는 힘들었지만 그게 지금 생각하니 하나님의 연단이었어요. 더 겸손해지면서 때가 되자 더 좋은 길로 인도해주셨어요.”


시험 보는 족집게 강사로 명성
본격적으로 토익 강사로 뛰었던 97년경에 다른 강사들은 유학파가 많았다. 국내파인 그로서는 내세울 경쟁력이 약했다. 고민이 시작됐다. 나만의 색깔을 낼 수 있는 게 뭘까. 이건 시험이니까 그렇다면 내가 직접 시험을 보고 점수를 올리는데 주안점을 두자. 새로운 발상이었다. 그때부터 토익시험 때마다 시험을 보고 문제를 분석해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효과는 컸다. 족집게 강사라는 명성이 자자해졌고 그가 낸 책 ‘토익, 답이 보인다’는 베스트셀러가 됐다.

제가 그동안 토익시험 본 게 기네스북 등재 거리가 됩니다. 아직 등재는 안시켰지만요. 이것도 전화위복이죠. 남보다 부족한 것을 극복하려고 애쓴 것이 더 좋은 결과를 나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인기를 얻자 학원 강사가 기출문제를 썼다고 고발을 당했어요. 법적으로 2년 동안 시험을 못보게 된 거예요. 저로선 큰 타격이었죠. 시험을 직접 보는 것이 제 경쟁력이었는데 그걸 못하게 되었잖아요.”

지금도 그 절박함을 잊을 수 없다. 그때 가까이 있던 사랑의교회 지하 기도실로 갔다.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전 시험을 봐야 하는 강사인데 시험을 못보면 사형선고 아닙니까. 하나님, 저 좀 살려주세요.”

뜻밖의 길이 열렸다. 일본에 가서 토익시험을 보는 방안을 실천한 것이다. 시험 때마다 토요일 날 일본에 가서 시험을 보고 일요일 날 밤에 귀국해서 문제를 분석하고 다음날 가르치는 일을 2년 동안 반복했다. 정말 힘들고 고단했다. ‘미친 짓’이었다.

“어느 날 일본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저의 토익 책을 일본어로 내고 싶다고요. 그게 일본에서 또 대박이 났습니다. 토익으로는 일본 최초의 번역책입니다. 그게 너무 잘 팔려서 일본 가서 시험 보느라 들었던 비용을 다 회수하고도 남았죠. 그후로도 20권 넘게 일본어판을 내고 있고요. 최근 한 TV방송에선 토익 부분 한류로 저를 뽑았습니다. 전화위복이 된 거죠.”

그의 전화위복 행진은 끝이 없다. 2003년경부터 EBS 라디오에서 토익을 강의했다. 쉬운 토익 강사로 들어간 그는 기존의 토익 강사들로부터 견제를 당했다. 그때 한 일간신문에서 ‘족집게 강사가 EBS를 망친다’는 기사를 그의 사진과 함께 대문짝만하게 냈다. 교육적이지 못하다는 부정적인 내용이었다.

비방이 되레 홍보가 되기도
“제 얼굴이 그렇게 안좋은 기사와 함께 신문에 났으니 얼마나 망신입니까. 누가 그랬는지 짐작이 갔어요. 너무 힘들었죠. 그런데요, 엉뚱한 일이 벌어졌어요. 노이즈 마케팅이 된 겁니다. 그 기사를 보고 저를 몰랐던 사람들까지 저를 찾으면서 더 인기가 높아진 겁니다. 저를 견제했던 사람들 책은 안팔리고 제 책만 더 팔리고요. 결국 저만 지금까지 살아남았어요.”

아픈 전화위복도 있다. 2년 전, 한참 산악오토바이에 취미를 붙일 때였다. 주일날인데 교회 가기가 싫었다. 교회를 빼먹고 강촌으로 산악오토바이를 타러 갔다. 그날 죽을 뻔 했다. 새로 나온 기종이라고 최고 속도로 달리다가 큰 충돌을 일으켰다. 그는 의식을 잃었고 어깨뼈와 손뼈가 으스러졌다. 큰 수술 끝에 깨어난 그는 그후로 오랫동안 고생을 했다. 얼마 전에 철판을 빼낸 손목 부근엔 거친 흉터가 남아있다. 담당 의사는 “이렇게 부러졌는데 손이 마비되지 않은 게 기적”이라고 신기해했을 정도다. 그 기적의 의미를 그는 아직도 마음에 새기고 산다.

“하나님이 한방 경고를 주신 것이죠. ‘야, 임마. 까불지 마. 돈 좀 벌게 해줬다고 주일도 안지키고.’ 그래서 경고를 먹은 것 같아요. 요새는 주일날 어느 지방에 출장을 가도 교회는 꼭 갑니다. 그리고 사고 후에 제 삶의 만족도가 더 높아졌어요. 그전엔 일상적이었던 일도 지금은 너무 행복하고 감사해요.”

김 원장처럼 유명한 강사들은 종종 술, 여자, 도박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 과중한 스트레스를 그쪽으로 풀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매여 사는 그는 그럴 틈이 없다. 그의 가방엔 늘 큐티 묵상 책이 있고, 스마트폰으로 큐티앱을 이용해 말씀을 묵상한다. 좋은 구절은 트위터나 홈페이지에 올리며 함께 나눈다. 오죽했으면 친구는 그에게 “넌 죽어서 태우면 사리가 나오겠다. 그렇게 살면 무슨 재미로 사냐”고 말했을 정도. 그러나 이것이 그의 롱런의 비결이다.

그래서 주일이 아니더라도, 교회당은 그의 쉼터다. 강남중앙침례교회를 다니는 그는 강의가 비는 시간이면 가까운 남대문교회, 승동교회, 영락교회 기도실을 애용한다. 거기선 모든 긴장이 풀어진다. 지친 입을 쉬게 하고 하나님께 귀를 연다. 이제 그가 듣는 시간이다. 십자가 아래에서, 지금껏 살면서 체득한 진리를 되새김질한다. ‘기도한다고 딱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주시진 않지만, 지나고 보면 항상 더 좋은 걸 주셨다.’ 그래서, 앞날은 불확실하고 경쟁은 나날이 치열해지지만, 그의 얼굴엔 항상 미소가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