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사 속 사회변혁의 초석을 놓았다

한국 장로교 총회 설립 100주년 - 장로교회를 돌아본다 ① 한국 장로교의 시작

2012-05-18     최창민 기자

올해 한국 장로교는 총회 설립 100주년을 맞았다. 지난 1912년 한국에서 장로교 총회가 처음 조직된 이후 분열과 성장을 동시에 경험했다. 한국의 장로교는 지난 한 세기 동안 다양하고 역동적인 모습으로 한국 사회와 함께 호흡했다. 또 한국의 역사적 좌표마다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공유하며 공과에 대한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비록 한국 장로교는 다양한 분파로 심각하게 분열돼 있지만, 한국 교회 성도의 70% 이상이 장로교인일 만큼 크게 성장했다.

이 때문에 한국 교회가 곧 장로교회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한국 기독교의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해 왔다. 최근 한국 교회 내에서 발생하고 있는 연합사업과 관련한 마찰이 대부분 주요 장로교단 사이의 대립 구도라는 점도 이 같은 사실을 방증하고 있다.현재 한국 교회는 장로교 총회 설립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학술 세미나를 통해 지난 역사에 대한 평가와 전망을 내놓고 있다. 한국 장로교의 유입과 역사적 기여, 분열과 성장, 개혁과 갱신 등 다양한 주제를 통해 지난 100년에 대한 고찰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본지는 한국 장로교 총회 설립 100주년을 맞아, 한국 장로교회의 역사를 살펴보고 개혁과 갱신을 위한 의제들을 살펴볼 예정이다. <편집자 주>

국내에 기독교가 처음 전해진 것은 한국인에 의해서였다. 1883년 만주에서 성경 번역에 참여했던 서상륜이 황해도 소래에 한국 최초의 교회를 세웠다. 이후 10년 간 미국, 호주, 캐나다 등에서 장로교 선교사들이 잇따라 국내에 들어온다.
 
# 장로교 전래와 한국사적 기여
미국 북장로교회 호러스 앨런이 한국 최초의 서양 선교사로 전해진다. 그는 1884년 9월 20일 미국 외교관 관의로 한국에 왔다. 1885년 부활절에 장로교 선교사 호러스 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입국했다. 1889년 호주장로교회, 1892년 미국 남장로교회, 1893년 캐나다장로교회 선교사들이 연이어 들어왔다.

처음 교회는 한국인에 의해 세워졌지만, 이후 들어온 선교사들이 참여하면서 한국 장로교회가 깊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장로교회는 한국의 근대화에 있어서 선구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광혜원을 설립하고, 전국 각지에 선교 병원을 세웠다. 전쟁에서 부상당한 조선인들을 치료하며 현대적인 의료 제도 도입하고 국내 선교 기반을 구축했다. 또 구습과 미신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금주·금연 등 절제 운동을 전개했다.

장로교회는 근대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사회제도 개혁에도 앞장섰다. 신분 차별 폐지 운동을 벌였으며, 초혼·축첩 등 봉건제의 악습을 폐지했다. 그 영향으로 1894년 7월 갑오개혁을 통해 양반과 평민의 신문 타파가 이뤄졌다. 장로교회는 남존여비 사상에 대항해 성경적 원리에 따른 남녀평등을 가르쳤다. 특히 여성의 교육에 관심을 갖는 등 여권 신장 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한글 보급에도 앞장섰다. 당시 한글은 사대부와 사대주의 관료들에 의해 오랫동안 언문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장로교회는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고, 교회를 통해 한글을 가르치는 등 한글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특히 1893년 장로교 공의회는 한글 전용정책을 통해 한글 대중화와 문맹 퇴치에 기여하고 한국 사회의 개화를 촉진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장로교회는 한글 연구에도 앞장섰다.

1894년 게일 선교사는 ‘한국어 문법 형식’을 펴냈고, 1896년 ‘한영사전’을 최초로 출간했다. 또 성경 번역 과정에서 한글 문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1904년 장로회 공의회는 한글 문법을 연구하기 위한 공식 기구를 세웠다. 이 기관은 대한제국이 설치한 국문연구소(1907년)보다 3년여가 앞선 것이었다.

장로교는 또 교육기관 설립을 통해 민족 계몽에 앞장섰다. 1893년 장로교공의회는 노동자와 하층민을 선교의 대상으로 삼기로 정하고, 교육 사업을 선교 방법의 하나로 채택했다. 교회 지도자들은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동시에 학당을 세우고 미션 스쿨 운동을 전개했다. 1910년 정부 인가를 받은 사립학교 2천여 개 가운데 약 800개가 미션 스쿨이었으며, 그 중 501개교가 장로교회였다.

이와 함께 장로교는 민족의 자주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고종을 보호했고, 애국 충군 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교회가 십자가와 태극기를 좌우에 게양하고, 미션 스쿨에서는 태극기를 달고 애국가를 제창했다. 일본은 장로교의 애국운동을 눈엣가시처럼 여겼으며, 105인 사건을 통해 교회 지도자들을 탄압했다.이 같은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1907년 원산과 평양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때를 기점으로 해서 회개를 특징으로 하는 생활개혁이 이뤄졌으며, 한국 교회는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됐다.

# 장로교 총회 설립과 독립운동
1907년 9월 17일 장로교회는 독노회를 조직했다. 정식 명칭은 ‘대한 예수교 장로회 노회’였으며 회장은 마포삼열(Samuel H. Moffet) 선교사가 맡았다. 총대는 한국인 장로 36명, 4개 선교부 선교사 33명, 대한성서공회, 기독교서회, YMCA 등 단체와 외국 목사들이 포함된 찬성회원 9명 등 총 78명이었다.

이만열 교수는 ‘한국기독교사특강’을 통해 “당시 교세는 989개의 교회와 예배처소, 1만9천 명의 세례교인을 포함해 전 교인이 7만 명이었고 장로가 53명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김영재 교수는 ‘한국교회사’에서 “독노회는 ‘12신조’를 채택하고, 노회 설립 기념으로 제주도에 이기풍을 선교사로 파송했다”고 밝혔다.

장로교 최초 총회는 1912년 9월 1일 오전 평양 경창문안여자성경학원 강당에서 목사 96명(외국 목사 44명, 조선 목사 52명)과 장로 125명 등 총 221명의 총대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회됐다. 독노회장 이눌서(William D. Reynolds) 목사가 ‘장자회’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후 언더우드를 회장, 길선주 목사를 부회장, 서기 한석진, 회계 방위량(William Blair)을 선임했다. 또 ‘12신조’를 재승인하고 장로교 정치 원리에 근거한 총회 헌법을 제정했다.

일제시대에 설립된 장로교 총회는 전국 교회를 신앙적으로 이끌며 시대에 주어진 사명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다. 장로교 총회는 총회 설립을 기념해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했다. 또 한인 디아스포라를 보호하고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전도목사를 파견했다. 특히 중국 상해에서 김구 등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돕기 위해 1916년 열린 제5회 장로교 총회는 그곳에 교회를 세울 전도목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했다.

1918년 연해주, 1921년 일본 고베, 1922년 러시아 시베리아, 1930년 내몽고에 전도목사를 파송해 한인 교회를 세우고 독립운동을 지원했다.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민족 자결의 원칙’을 공포한다. 이후 기독교 지도자들은 천도교를 설득해 3.1독립 운동을 조직적으로 이끌었다. 이때 발표된 독립선언서 서명자 33인의 절반인 16명이 기독교인이었으며, 만세 운동으로 인해 유죄선고를 받은 9천여 명 가운데 2,033명이 기독교인이었다. 또 3.1운동을 통해 희생된 사람 중 다수가 장로교인이었다.

당시 일본이 작성한 통계에 의하면 투옥자 19,525명 중 3,42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전체 투옥자의 17.6%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당시 기독교인은 전 인구의 1.3%에 불과했다. 1919년 열린 제8회 장로교 총회는 독립운동에 참여해 체포된 자 3,804명 중 목사와 장로가 134명, 기독교 관계 지도자 202명, 사살된 자 41명, 수감 중인 자 1,642명, 매맞고 죽은 자 6명, 훼손된 교회 수가 12개라고 밝혔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오덕교 교수는 “수감자 가운데는 총회장 김선두, 전 총회장 양전백, 부흥사 길선주 등이 포함돼 있었다”며 “당시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은 3.1운동을 자국에 소개하고 독립 운동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한국 교회의 선교 초기 역사의식에 대해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성돈 교수는 “장로교회는 개화시기와 맞물려 애국애족에 대한 정체성을 갖고서 한글의 우수성을 발견했고, 개화촉진과 근대문화 수용의 도구 역할 그리고 민주시민의 가치관 형성, 신분상승의 기회를 부여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