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수의 구약 읽기(13)

2005-01-03     

                                                                                                박종수교수/강남대 구약학


사라가 죽고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리브가와 장가드는 이야기가 창세기 23~24장에 전개된다. 당시 아브라함의 주변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므로 그들과 혼인 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기 고향 메소포타미아까지 사람을 보내 신부감을 구하게 한다. 천생연분이라 했던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삭과 혼인하겠다고 따라 나선 리브가의 결단은 여인의 용기를 보여준다.


부모 형제를 떠나 가나안으로 온 리브가는 사라 대신 안방 마님으로 자리잡고, 아브라함도 사라의 뒤를 따라 저 세상으로 가게 된다(창 25:7~11).

성경에 등장하는 이삭의 존재는 미미하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아내 리브가를 누이라고 속인 적이 있다(창 26장). 그는 희생제물의 대상이 되어 죽을 고비를 넘긴 적도 있다(창 22장). 성서 역시 이삭에 대한 이야기를 독립적으로 취급하기보다는, 아브라함이나 야곱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한 보충 수단으로 이삭을 등장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삭이 한 일 가운데 두드러진 것이 있다. 그것은 ‘우물을 파는 일’이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다시 파기 시작했다. 그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해서 메웠던 우물이었다. 아브라함 당시만 해도 식수원을 확보한다는 것은 종족의 번영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던 중요한 일이었다.


이삭은 선친 아브라함의 유업을 계승하고 가문의 재산을 확보하기 위해 우물을 판다. 우물 파는 일은 단순히 식수원의 확보에 그 목적이 있지 않다. 그것은 조상의 혼을 다시 살려내는 것이다. 그 시점에서 새로운 우물을 팔 수도 있었을텐데 과거의 우물, 이미 메워진 우물을 다시 판다는 것은 잃어버린 유산을 되찾는 정신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와 우리 민족이 아픔을 당할 때 많은 위로와 소망을 준 것이 사실이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의 민족 문화는 상당 부분 상실되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유산을 찾기 위해 폐허가 된 우물을 살리고자 했지만 우리는 유산을 찾는데는 관심없이 서구 기독교를 받아들이기에만 급급했다. 그 결과 우리의 문화와 전통들은 서구 문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멸시 당해 왔고 점점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한 번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삭이 이미 폐허가 된 우물을 다시 판 것처럼 우리도 조상들의 우물, 생수가 담긴 지혜의 샘물을 다시 찾아야만 한다.

그 다음 이삭이 했던 것처럼 새로운 우물을 파는 것이다. 이삭은 조상들의 우물이라고 해서 닥치는 대로 다시 파지는 않았을 것이다. 계속해서 생수를 공급할 수원지라고 판단된 것들을 다시 파고 부족한 수원은 새로운 우물을 발견함으로써 해결했을 것이다(창 26: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