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중복되는 말' 사용을 삼가야 한다
2003-04-13
예컨데, “고맙고 감사하신 하나님 아버지”,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믿음과 신앙을 더하옵소서”, “간절히 비옵고 기도합니다”, “근심 걱정 우수사려(憂愁思慮)가 많은 세상에서”, “받아 열납(悅納;창4:4)하여 주옵소서”, “봉헌하여 드리오니(바치오니)” 등등이 주로 많이 사용되고 있는 사례인데 이는 표현어휘 (형태요소)는 달라도 뜻(의미요소)은 같은 말이다.
이를 부연하면〈고맙고 감사함〉,〈바라옵고 원함〉,〈믿음과 신앙〉,〈비옵고 기도함〉,〈근심 걱정과 우수사려〉,〈받으심과 열납〉,〈봉헌과 드림 ; 바침〉등의 말들은 의미상의 같은 말임에는 틀림없다.
물론 습관적(語癖)으로 무의식 중에 쓰거나 또는 기원(祈願)적인 간절성을 더하고자 강조하는 뜻에서 그럴 수 있지 않느냐고 변명이 가능할 지는 모르나 공중기도일 때 회중들의 화답상(和答上)의 어감은 좋지 않고 또한 언어의 중복성은 기도의 단순성(單純性) 원칙에도 적합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기도의 조건이 말의 화려함이나 어휘의 풍성함에 있지 않고 기도자의 신앙과 밝은 영성이 우선되어야 할 이유가 있기에 더욱 그렇다.
특히 성경 말씀에 “기도할 때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重言復言)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6:7)고 하였는데 이 “중언부언”은〈이미 한 말을 자꾸 되풀이 함〉이란 뜻의 말로서 분명히 앞에 예시된 말들은〈되풀이한 말〉임에 틀림 없고 기도의 진지한 중심을 담지 못한 언어 표현상의 음보(音步)를 맞추거나 기도자의 의지적인 강조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말의 군더더기를 더하는 것에 불과하며 이런 기도는 이방인과 같은 기도로서 응답 조건에서 제외되는 기도의 본의(本意)를 갖추지 못한 것일 수밖에 없다.
기도신학은 기독교회가 생명의 호흡과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것으로써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약속이다.
그리고 기도는 자유로운 인간과 능력의 하나님 사이의 언약적 관계가 믿음 위에 기초하여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필요한 청원에 반응하시는 사랑의 방법으로 주어지는 신적 관계의 실증적인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인간의 자기 실현이나 도덕적 성취를 위한 종교심성에 기초하지 않으며 어디까지나 기도는 하나님 중심적인 신학원리에 기초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언부언(repetition)의 이중적 표현이 아닌 기도의 구성조건 중에 하나인 중요한 요소가 단순성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 주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은 언제나 우리의 기도의 전형(典型)이다. 거기에는 문체의 화려함이나 의미의 이중적 강조나 수사적 기교와 장광(長廣)한 서술이 없을 뿐 아니라 현세적 기복(祈福)이나 강요적 청원과 종교적 억지가 없고 절대자를 이렇게 설득케 해야 한다는 주술(呪術)적 탄원의 요소가 배합되지 않았으며 담백하고 단순하면서도 신의 차원과 그의 백성의 차원이 조화를 이루어 신의 압도와 인간의 간청이 치우치지 않게 접근되어 있으면서 무한자와 제한자의 생명적 관계를 결합하고 있는 신학이 있는 것이다.
이 기도야 말로 우리의 일상 생활의 표준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주님이 일깨우신 기도의 교범(敎範)인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사람에게 듣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말로 하나님께 하는, 하나님이 유일한 대상임을 알아 현재성에서 지금 듣고 계신다는 고백적 심정으로 말의 중복을 통한 자기 처지를 설명코자 하지 말고 중보된 언약에 의존된 간구가 되도록 해야한다. 확신에 찬 기도는 중언부언하지 않는다.‘구하기 전에 너희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마6:8,32) 하나님께 바르게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