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인간, 그 구원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신학 검증 <끝> - 구원자, 과연 누구인가?
고영민박사 <백석문화대학 학장>
이제 제3부 ‘남태평양의 붉은 십자가’에서는 바누아투의 타나섬에서 원주민들이 붉은 십자가를 세우고 미국인 존 프럼(John Frum)을 메시야로 믿게된 과정과 그들에게 선교사를 파송했던 영국교회의 최근 모습, 그리고 미국교회의 실상 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제4부 ‘길 위의 인간’에서는 이슬람교의 시아파와 수니파 사이의 종교적 갈등과 한국교회의 이원론적 사고방식, 친미적인 성향 등을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SBS가 3년여 동안 막대한 자금과 인원을 총동원하여 제작한 이 다큐멘터리가 우리에게 제시하려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며 이에 대해 한국교회는 무엇이라고 답변할 것인가?
제3부 ‘남태평양의 붉은 십자가’가 타나섬에 세워진 이유는 무엇인가?
타나섬은 남서 태평양에 있는 바누아투(Vanuatu) 공화국의 13개의 섬들 중의 하나로서 지금도 뜨거운 용암을 분출하는 아슈라라는 활화산이 자리잡고 있다. 원래 원시 부족이 살고 있었던 이 섬이 유럽인의 눈에 띄게 된 것은 17세기 초 스페인 사람 카로스에 의해서였다.
그 후 제임스 쿡이 이곳을 탐험하여 뉴헤브리디즈 제도라고 명명하였고 이어 영국과 프랑스가 진출하면서 열강들의 치열한 각축장이 되었다. 언제, 어디에서나 그러했듯이 영국 선교사들이 이 섬에 복음을 들고 찾아왔고 원주민들은 처음으로 성경과 십자가를 대하게 되었다.
제3부는 3개 나라를 주요 촬영무대로 설정하고 있다.
‘첫번째’ 촬영 무대는 다나섬. 원주민들이 미국의 성조기를 앞세우고 군대 제식 훈련을 하듯 행진을 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메시야라고 믿고 있는 미국인 존 프럼(John Frum)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였다. 일찍이 이곳에 파송된 영국 선교사들은 그들에게 엄격한 신앙생활을 강요하였다. 일종의 마약음료인 카바와 전통적인 춤을 금지시켰고 주일에는 모두 빠짐없이 교회에 출석하도록 강권하였다. 그런데 1930년 어느 날 존 프럼이 나타나 이상한 예언을 하기 시작했다.
즉, 앞으로 기독교가 원주민들의 전통과 문화를 파괴할 것이며, 성경은 말만 하고 실천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후에 그는 다시 나타나 예언하기를, 머지않아 영국 선교사들과 백인들이 쫓겨나고 원주민들이 도로 섬을 차지하게 되며 미국이 와서 도와줄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말대로 영국은 그 섬에서 철수하여 독립을 하게 되었고 2차 대전 때에는 미군들이 그곳을 찾아와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로 말미암아 존 프럼은 그들 사이에서 위대한 예언자, 더 나아가 신적인 존재, 메시야 등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가 다시 재림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몇 가지 사실들에 특별히 유의해야할 필요가 있다.
1. 나이 많은 추장과 원주민들은 한결같이 “이전의 선교사들이 자신들을 때리고 고문하고 심지어 감옥에 가두기도 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우리는 세계 선교역사에서 기독교를 믿지 않거나 잘못을 저지른다고 이슬람교처럼 체벌하거나 구금시켰다는 기록을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이전에 영국 식민지하에서 당했던 일들을 모두 선교사들의 탓으로 돌리거나, 아니면 자신들이 즐기던 카바 음료나 춤을 못 추게 한 것에 대해 일종의 보복 충동을 느꼈을 수 있다. 이것은 이미 미국의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Clifford Geertz)가 간파한 내용이기도 하다.
2. 한편 그들이 메시야로 추앙하는 존 프럼은 그 누구보다도 원주민들의 불만이 어떤 것인지를 재빨리 알아차렸고 그것을 이용하여 무지한 그들을 선동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의 협정에 의해 바누아투의 독립이 임박하고 또 2차 대전에 미군이 승리할 것을 미리 내다본 존 프럼은 당시 세계 정세를 전혀 모르고 있었던 원주민들에게 앞날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예언함으로써 절대적인 신임을 얻게 된 것이다. 그는 위대한 예언자나 메시야가 아니라 약삭빠르고 처세술에 능한 일개 백인에 지나지 않았다.
3. 이번에 SBS가 바누아투의 타나섬에 포커스를 맞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상을 존 프럼의 수준에로 비하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이요 전체 기독교인들에 대한 인격적인 모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 방송사상 최악의 프로그램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두번째’ 촬영 무대는 영국이었다. 젊은이들이 십자가 종탑이 있는 교회 안에서 술을 마시고 광란의 춤을 추고 있다. 해설자는 교인들이 없어 문을 닫은 교회 건물을 누군가가 구입하여 나이트클럽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지금 런던 시내의 교회들은 술집이나 다른 용도로 쓰기 위해 리모델링 중이라는 말도 덧붙이고 있다. 그곳에서 춤을 추고 있는 소녀는 “우리가 여기서 신나게 즐긴다면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이요” 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자신이 크리스천이라고 밝힌 다른 소녀는, “교회가 아니어서 춤을 추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을 태연스럽게 한다.
화면은 교회 건물 안에서 기도하고 있는 이슬람교도들을 비춰준다. 그들은 교회 건물을 사서 이슬람 사원으로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샤머니즘 의식을 드리는 영국의 젊은이들, 어릴 때 세례받은 것을 취소했다는 중년 부부, 한 때 기독교인이었지만 불교로 개종했다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4만7천 교회들 중에서 1천3백 교회가 용도를 변경하였다는 통계 숫자도 밝히고 있다.
이런 내용들은 실로 충격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사실 그대로이다. 텅 빈 교회, 노인들 몇 사람만이 모이는 교회, 팔려고 내놓거나 용도가 변경된 교회는 영국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 때 기독교가 성행했던 서구의 모든 국가들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물질과 부의 풍요는 교인들을 교회에서 떠나가게 했고 성경을 인간의 글로 격하시키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내리기에 혈안이 되어있던 신학자들은 교회의 세속화를 더욱 촉진시켰다.
이제 한국교회는 금번에 방영된 내용들에 대하여 SBS를 향해 성난 구호만을 외칠 것이 아니라 몰락한 서구의 교회들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새로운 교회 개혁과 철저한 회개 운동을 함께 펼쳐 나가야만 한다. 무릇 귀 있는 자는 주님의 말씀에 다시금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돌이켜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도 이와 같이 망하리라.”
‘세번째’ 촬영 무대는 미국이다. 먼저 미국은 전체 인구의 4분의 3이 기독교인이라는 멘트와 함께 열광적으로 기도하는 모습과 나이트클럽의 분위기로 드리는 예배 장면들이 차례로 화면에 비춰지고 있다. 십자가는 보이지 않고 목사는 청바지 차림으로 설교를 하는가 하면 차에 타고 앉아 드리는 예배, 해변가에서 드리는 예배가 소개된다. 그런가 하면 레슬링 쇼를 보고 난 후 드리는 파격적인 예배까지 소개되고 있다. 해설자는 미국교회들이 문닫는 영국교회들과 달리 생동감이 넘치고 계속 존립해 나가는 것은 이례적인 현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를 교회들이 성장과 부흥을 위해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그리고 SBS는 종교성이 강하고 기독교인이 많은 미국에 살인이나 강간, 폭력 등 범죄율이 오히려 더 많고 빈부격차가 심한 것은 매우 아이러니컬한 일이라고 꼬집고 있다. 그밖에 미국의 젊은 크리스천들 중 30%가 임질에 걸리거나 낙태, 자살을 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통계자료도 제시하고 있다.
물론 이 사회가 혼탁하고 빈부의 격차나 범죄율이 많은 것에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직분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한 기독교인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잘못과 책임이 있다. 그러나 모든 사회악들을 무조건 교회 탓으로 돌리는 것은 마치 가난한 자들이 못사는 것은 부자들 때문이요 무식한 자들이 있는 것은 유식한 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실상 한 국가의 종교율이 소득불균형이나 사회 부조리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밝혀낸 상식적인 결론이기도 하다.
인류 초창기의 가인과 아벨 이후로 사람들의 공동체에는 빈부격차와 각종 범죄들이 성행하였으며, 소위 종교적 열심이 탁월한 나라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슬람교의 중동이나 유대교의 이스라엘, 불교의 인도, 유교의 중국에도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으며 다소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똑같은 형태의 범죄가 행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BS 기획자가 미국의 기독교와 빈부격차, 사회악, 범죄율을 연관시켜 평가한 것은 기독교를 한낱 위선적이고 이율배반적인 종교로 비하시키고 그 근본적인 정체성을 훼손시키려고 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제 SBS 기획자에게 진지하게 묻고 싶다. 그러면 자신들의 신앙과 교리를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각종 테러와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으며 타종교에로 개종하면 명예살인도 묵인하는 이슬람교의 폭력성에 대해서는 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가? 그리고 이슬람교가 선교하거나 사원을 지어도 아무런 제재나 억압을 하지 않는 미국이나 구라파, 우리나라의 종교적 자유에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가? 그러기에 한기총은 “SBS가 이슬람교와 어떤 관계인지를 해명하라”고 공개적으로 질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제4부 ‘길 위의 인간’, 그 유일한 구원자는 누구인가?
SBS는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두 사람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선한 사람이 악행을 한다면 그것은 종교 때문이다. 종교는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한다”(스티븐 와인버그). “사람은 종교적인 확신을 가졌을 때 철저하고 자발적으로 악행을 저지른다”(파스칼). 두 사람이 어떤 의도에서 그런 말들을 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이번에 SBS가 기획한 ‘신의 길 인간의 길’이 전하려는 메시지를 가장 정확하게 짧은 말로 요약한 말들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말하자면 SBS가 ‘신의 길 인간의 길’을 기획한 것은 종교들과의 대화나 화해가 아니라 모든 분쟁과 악행의 중심에 종교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밝히려고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아브라함과 연관이 되어있는 이슬람교, 기독교, 유대교를 비교하면서 모든 문제의 출발점은 근본주의와 문자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원래 시아파(Shiah)는 여러 분파들을 총칭하는 말로 정통파로 불리는 수니파(Sunnis)와 함께 이슬람교의 2대 종파를 이루고 있다. 두 종파는 이슬람교의 설립 초기부터 후계자 문제를 놓고 극심한 갈등을 빚었으며 지금도 각처에서 서로를 무참히 죽이고 죽는 피의 보복전이 계속되고 있다. 시아파는 일찍이 살해당한 그들의 종교지도자 후세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애곡하거나 피가 흐르도록 손이나 쇠사슬 등으로 몸을 내리치는 의식을 거행한다.
SBS 해설자는 이러한 아슈르의 고행을 예루살렘의 비아돌로사에서 기독교인들이 십자가를 메고 행진하는 것에 비교하고 있다. 그러나 겉으로 보면 두 행사는 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의미와 목적은 전혀 다르다. 아슈르 행사는 단지 한 인간의 죽음을 슬퍼하기 위한 것이지만 비아돌로사 행사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던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사흘 만에 다시 사신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계속해서 해설자는 이슬람교의 12번째 이맘인 자먼이 예수와 함께 재림할 것이라고 믿는 이슬람교의 신앙을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고난이나 재림은 이슬람교의 그것과 전혀 차이가 없는 일반 종교의 보편적인 믿음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인류 초창기부터 있어왔다고 말하면서 그 실례로 프랑스에서 발견된 네안더털인의 매장 관습을 소개하였다.
즉, 그들이 시신 위에 돌을 올려놓은 것은 그들에게 재림의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언급들은 기독교를 일반종교나 원시종교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는 실로 교활하고도 야비한 논법에 지나지 않는다.
그동안 세계 이곳저곳에서 숨가쁘게 돌아가던 카메라의 앵글은 한국교회에 또다시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한국의 기독교가 왜 세계의 기독교와는 정반대로 크게 성장하고 있으며 또 성경을 문자대로 믿는 기독교인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묻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충격적인 것은, 한국의 기독교는 선과 악의 이원론 사고방식을 가고 있으며 이것은 B.C. 7세기 파사 지역에서 일어났었던 조로아스터교(배화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어느 종교학자의 말을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밖에도 천국과 지옥, 유일신 사상, 사탄의 존재도 조로아스터교에서 비롯되었는데 이것은 바벨론에 있을 때 자연스럽게 접촉된 결과라고 하였다. 그리고 파사의 고레스를 성경이 메시야와 목자, 기름부음 받은 자로 묘사하고 있는 것도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고 했다.
물론 한 종교학자의 의견을 놓고 굳이 학적으로 따져야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지만 금번 SBS가 기획한 전반적인 의도를 볼 때 그것은 실로 저질적이고도 편견적인 아마추어리즘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더 나아가 그 동안 줄 곧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해 온 어느 원로 신학자와 인터뷰하면서 “기독교는 절대적인 종교가 아니다”라고 말한 대목을 그대로 인용한 것은 경악과 실망의 차원을 넘어 안쓰러운 연민의 정까지 느끼게 하고 있다.
끝으로 SBS 기획자는 한국교회가 지나치게 친미적인 성향을 띄고 있는 문자주의에 얽매어 있다고 평하고 있다. 친미적이라는 것에는 타나섬의 기독교를 연상시키려는 묘한 뉘앙스가 담겨져 있고 문자주의라는 것에는 형식주의, 배타주의, 권위주의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한국교회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기독교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보수적 성향을 띈 교회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타종교와 더불어 격렬한 논쟁이나 싸움을 벌였던 적이 없다. 한국교회는 꾸준히 성장하는 건강한 교회로서 미국 다음으로 많은 선교사들을 세계 곳곳에 보내고 있고 병원과 학교, 복지시설, 군대 그 밖에 그늘진 곳을 찾아 활발히 봉사와 구제활동을 펴고 있으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무지와 편견 가운데 독선적으로 기획, 방영된 SBS에 더 이상 항의의 목소리를 높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을 되돌아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아 아름답다고 건강한 미래 교회를 위해 겸손히 두 손을 모으고 조용히 무릎을 꿇도록 하자. 그리고 SBS로 하여금 언젠가 T.V. 자막에 ‘길 위의 인간, 그 구원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라고 쓰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