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세기한국사회와 교회를 말한다-실용주의
기업경영 방식 도입 발빠르게 도입 '우쭐'
‘실용주의’(프래그머티즘)가 교회 안에 성행한다. 말 그대로 쓸모 있는 것들의 가치만을 최고로 치는 생각이 각광을 받고 있다. 실용주의는, 교회는 성장에 유익한 것들에 주목하게 만들고 성도들은 삶의 질을 윤택하게 하는 것들을 환영하게 만든다. 나와 우리들, 우리 단체에게 유익하면 그것이야말로 반드시 고수해야 할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인 것이다. 교회 안에 들어온 실용주의는 우리의 눈과 생각을 현재에 고정시켜 더 큰 미래의 찬란한 빛을 무시하게 한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더해 준다. 오로지 현재의 효용성에만 집중시킴으로써 성경이 제시해 주는 원리와 원칙의 중요성을 감소시킨다. /
한국판 실용주의의 대표로 손꼽히는 것은 다산 정약용 선생을 중심으로 한 ‘실학사상’이다. 실학사상은 중국의 주자학이 성행하던 우리나라 조선조 말기에 일종의 이단사상의 유포로 여겨지기까지 했을 정도로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실학이 조선시대의 양반을 비롯 특권층을 비호세력을 비판했다는 점에서 양반층이 이단사상으로 낙인찍었다는 것이 학계의 평가다. 상공인들과 농민들을 중시여기는 사회공동체여야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 실학이었으니 당쟁과 허세로 세월을 만끽하던 양반들에게는 언젠가는 꼭 뿌리 뽑아야할 가시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실학은 이처럼 특권층을 양산하며 보존계승하던 기존의 삶의 체계를 일반 백성들의 환영을 받으며 송두리째 흔들어댔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상공인들과 농민들, 양반층의 위화감을 최소화하는 삶의 원칙을 담아낸 사조 가운데 예수이름이 전해졌다는 사실이다. 실학은 양반제도사회 속에 평등사상을 고취하며 복음이 싹트도록 돕는 원동력 역할을 했던 것이다.
원하지 않았던 임신, 낙태로 해결
실용주의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은 맹종적이기까지 하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실용주의에 흠뻑 빠져있다. 낙태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낙태에 대한 우리사회의 객관적인 판단은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는 한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듯 하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낙태라는 것이 꼭 ‘생명이라는 기준’에만 연결돼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아기를 출산할 경우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쁠까. 경제적인 여건상 양육자체가 힘든 것은 뻔한 일이고, 앞으로의 직장생활과 기타 여건상 출산은 아무래도 유보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다.
낙태를 결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준은, 바로 좋건 나쁘건 현재의 상황인 것이다. 원하지 않은 임신을 했어도 여건이 허락하지 않으면 낙태해도 좋다는 생각이다. 이것이 실용주의가 생활 속에 파고든 결과 나타나는 사례이다.
처음에는 잘될 것으로 믿고 시작한 결혼생활. 하지만 상상하던 것과 달리 결혼생활은 예측 못했던 일들이 뒤죽박죽 섞이며 혼란스러워져 간다. 부부간 싸움도 많아졌고 자녀양육도 소홀해진다. 이렇게 사는 것은 원하던 것이 아니라며 부부는 이성적으로 토론과 기나긴 숙고 끝에 이혼에 합의했다.
사업상 이득을 가져다 줄 내부거래. 비록 법적인 테두리 속에서 편법을 동원할지언정 사업성공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내부계열 간 거래는 필수다. 법적인 문제는 일단 기업을 살리고 난 다음에 처리해도 문제될 것은 없다. 법적인 규제가 있어도 사업상 이득이 된다는 판단에 따라 내부거래는 자연스럽게 성사된다. 이것이 실용주의의 또 다른 사례다.
실용주의는 우리에게 정해진 목표와 목적을 달성하기에 충분한 과정을 제시한다. 목적달성에 필요한 것이면 언제든 수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낸다. 유쾌한 결혼생활과 안락한 미혼의 생활을 위해서는 낙태를 결정해야 하고, 사업성공이라는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내부거래쯤은 무방하다고 보는 관점을 제공해 준다. 우리는 이미 정해진 목표달성을 위해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실용적 생각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옳은가”보다 “효과적인가”에 따라 판단
우리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그것이 옳은가?”라는 질문 대신 “그것이 과연 효과적인가?”라고 얼마나 많이 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실용주의는 ‘원칙’보다는 ‘효과’에 집착하게 한다. 무엇인가 실행에 옮겼을 때 나타날 결과(효과)에 따라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이 결정된다는 얘기다.
따라서 실용주의는 목적에 얼마나 가까이 근접하도록 실천했느냐며 그 결과에 주목한다. 목적에 가능한 한 가까운 결과물을 창출하도록 다양한 방법들이 동원되고 그런 시도들 가운데 버려질 것들이 구별된다.
얘기를, 몇 년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기업의 구조조정에 돌려보자.
금융대출 원금과 이자를 상환하기 위해 기업은 재정구조 축소를 목표로 잡았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들이 동원됐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감원결정. 이른바 쓸모없는 직원을 대량해고 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재정축소라는 목적을 위해 해고가 결정된 것이다. 해고는 ‘생계유지’측면에서는 원칙에 어긋났지만 효과면에서는 실행돼야 했다. 목적을 위해 효과적인 방법들이 총동원됐다. 간간이 나타나던 실용주의는 현재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혹은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상륙해 정치와 기업, 학교, 교회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가리지 않고 그 막강한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실용주의는 나쁜 것인가 생각해 볼 일이다. 목적을 위해 효과를 따지면서 합리적인 방법으로 예측하는 실용주의가 왜 인간의 사악성을 부추기는 것일까.
실용주의는 1870년대 C.S.퍼스에 의해 주장됐고, 19세기 말에 W.제임스에 의해 전세계에 퍼졌으며, 20세기 전반에 와서는 G.H.미드와 J.듀이에 의해 구체화됐다. 이들은 “관념은 늘 행동으로 나타날 때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실험할 수 없는 관념은 무의미하다”고 했다.
실용주의를 가장 잘 설명한 초창기 예는 손으로 찰흙을 눌렀을 때 확인할 수 있는 자국으로, 우리의 관념 역시 관념의 대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으로 주장했다.
기독교의 경우, 이들은 절대자인 신(神)을 믿음으로써 용기가 생겼다면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며 신 관념이 어떤 것이라고 하더라도 유용한 결과를 보여주면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유용성에 따라서 진리가 밝혀진다는 주장이다.
목적실현 위한 인본적 발상 가득
실용주의는 성장과 발전을 추구하는 인간의 기준점에 의하면 엄청난 매력을 지닌다. 성장을 가속화 시키고 그 가운데 일어나는 각종 장애요인을 ‘합리적으로 제거’하는 명분을 준다는 점에서 실용주의는 첨단 시대를 주도할 사조임에 틀림없는 듯하다.
실용주의가 파고든 한국교회의 폐해는 적잖이 심각하다.
최근 인기리에 도입되는 교회경영 기법은 그 대표적인 예다. 이익을 위해 운영되는 기업의 컨설팅 방법이 교회에 도입되는 추세가 거세지는 가운데 교회가 신앙공동체가 아니라 기업의 한 측면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성장과 발전을 목적으로 잡은 한 한국교회는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도입할 것이다.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기업의 인력배치 기법을 교회직원에게도 적용하는가 하면 교회홍보 역시 마케팅 전략이라는 측면에서 적극 진행되고 있다.
대기업 화상회의를 본 따서 지성전 동시예배(화상설교 위성예배)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심지어 강력한 기독교영성을 위해 갖가지 사이비적 행태들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특별히 영성에 관한 문제는 실용주의에 물들면서 엄청난 왜곡의 위기에 직면한 것이 사실이다. 현 사회가 규정하는 도덕과 윤리의 범위 안에서 흠 잡히지 않아야 영성이 충만한 것으로 파악되는 현재의 기독교영성은, 어쩌면 겉으로 수준 높은 도덕성을 유지하는 신앙인들의 전유물이 될 상황에까지 와 있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수준 높은 도덕성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지만 정작 예수님의 태도는 냉랭하셨다. 특히 강력한 예언은사를 통해 영성을 실용주의적인 관점에서 증명해야 하는 실정이기도 하다. 난도질당하고 있는 기독교세계관을 회복하기 위해 실용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아쉬운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