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신경의 구조가 삼위일체론적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신경은 성부에게 창조를 돌리고 있지만 창조라고 하는 것은 유독 성부에게만 해당되는 사역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른바 창조 구속 성화는 삼위 하나님의 외적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삼위일체의 외적 사역은 분리불가”(Opera Trinitatis ad extra sunt indivisa. The external works of the Trinity are undivided)라고 하는 말은 창조 구속 성화에 삼위 하나님이 모두 관여하심을 의미한다.
창조에서 성자의 사역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이단종파에서는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씀에서 ‘하나님’이라는 헬라어(theos)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지 않다는 것을 빌미로 “이 말씀이 신적인 존재였다”는 식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이런 해석은 잘못된 해석이다. “헬라어에서는 하나님 앞에 관사가 전혀 붙지 않기 때문에, 그 용어는 그 말씀의 한 가지 특성을 제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이 명사이기 때문에, 요한이 그 말씀의 신위(Godhead)를 확증하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Guthrie, 『신약신학 2』, 224).
이는 골로새서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5~17) 물론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라는 말은 그 자체만 가지고 보면 그리스도가 피조물이라는 진술처럼 들리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보면 전혀 그럴 수 없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라고 말하고 있기에 만물의 창조주가 피조물에 속할 수는 없다(Guthrie, 『신약신학 2』, 224).
문제는 창세기 1장의 본문을 기독론적으로 읽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칼빈은 기독론적으로 창세기 1장 읽기를 거부하고 있다. 스트라스부르그의 종교개혁자였던 카피토(Wolfgang Capito, c. 1478~1541)는 ‘태초’를 하나님의 제2위이신 말씀과 결부시켰는데 이것은 아리우스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아니라 ‘최고의 피조물’(optima creatura)로 정의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칼빈은 카피토와는 달리 “태초라는 용어를 그리스도와 연관시켜” 설명하는 것은 천박하다고 지적했다.
보통 잠언 8장 22~26절은 “세상보다 먼저 창조된 지혜”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곤 한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잠 8:22~26). 잠언에서 음녀 우매에 대비되는 ‘여인 지혜’는 하나님과 함께 세상의 창조에 참여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지혜를 가지고 계셨다. 어떤 사람들은 잠언 8장에서의 지혜를 피조된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아리우스주의자들이 그러하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문맥을 무시할 때만 가능하다.
창조에서 성자의 역할과는 달리 성령 하나님의 역할은 비교적 명확하게 창세기 1장에 나타나 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 104:30)
시편 8편과 시편 19편 그리고 시편 104편은 창조시편으로 알려져 있다. 시편 8편은 밤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지은 시편이라면 시편 19편은 그 시간대가 대낮이라고 할 수 있다. 시편 104편에서는 피조세계 전반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자적인 관심과 돌보심을 노래하고 있다.
창조 사역에 있어 성부가 전면에 부각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창조를 성부만의 사역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양태론적 오류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창조론의 삼위일체론적 차원을 견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